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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뿐인 ‘자율협약’/김준형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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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뿐인 ‘자율협약’/김준형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입력
1997.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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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유예협약이 탄생하기 하루전인 4월17일 전국은행연합회 고위 관계자의 사무실. 한 지방은행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갑자기 왠 은행장 회의죠? 내일 회의에서 만들겠다는 협약이라는게 뭡니까』 『나도 몰라요. 「하늘」에서 내려온 거라서』 다음날 은행장들은 기업과 금융기관의 운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부도유예협약을 공표했다. 「자율협약」이라는 강조가 뒤따랐다.넉달 반이 지난 1일 은행장들은 이번에는 부도유예협약을 대폭 손질하기 위해 모였다. 은행연합회장은 『주말(이틀전)부터 의견을 수렴했다』고 회의벽두에 밝혔다. 하지만 손꼽히는 한 대형 시중은행조차 개정의견을 보내라는 이야기를 못들었다고 밝혔다. 은행장들은 대부분 이날 아침에야 「집합」통보를 받았지만 협약 개정안을 통과시키는데는 한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협약의 또 한 축인 종금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은행장들과 비슷한 시간에 모인 종금사 사장들은 책상앞에 덜렁 놓여진 개정안에 서명을 했다. 한 종금사 사장은 『이견도 없지 않았지만 이미 정해진 거라서…』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새로 협약 가입대상으로 「지명」된 생명보험사 대표들은 아예 개정안이 통과된지 반나절이나 지난 하오 4시에서야 모여 도장을 찍었다.

정부가 만들고 정부가 고치는 「자율협약」이 만들어낸 희화를 굳이 끄집어내는 것은 정부가 현 금융상황에 대해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법제화에 따르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율협약」의 모양을 빌었다는 것까지도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 흔한 공청회나 보고서까지는 안되더라도 금융기관들이 스스로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논의하고 수정하도록 하는 절차와 형식은 만들어 줬어야 했다. 갓난아이를 업고만 다니면 평생 걷지 못한다. 서툴러도 걸음마 연습을 자꾸 시켜야 손을 놓았을때 주저 앉지 않고 설 수 있는 것이다. 금융자율화는 먼나라의 얘기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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