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할머니가 그토록 그리던 고향과 혈육을 찾았다.6월14일자 한국일보의 특종보도로 훈할머니 사연이 국내에 처음 알려진지 75일만이자 고국땅을 다시 밟은지 25일만에 50년 한을 푼 것이다.
훈할머니가 혈육을 찾게 된데 대한 감회도 남다르다.
첫 보도직후 경남 마산의 진동이 고향일 가능성이 높아 부산과 마산 현지 기자들을 동원, 두달반동안 여러 경로로 가족찾기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부산에 사는 김모(61)씨가 가족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직접 김씨 가계에 대한 밀착취재를 하기도 했다. 유전자 감식에서 김씨 가족은 훈할머니 혈육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쉬웠지만 원점에서 새로운 가계를 찾아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훈할머니와 관련된 제보는 뜸했고 가족찾기도 답보상태에 빠졌다. 4일 훈할머니가 귀국해 인천, 전북 부안, 경남 마산 등 진동이란 지명을 가진 곳을 직접 찾아나섰지만 고향찾기는 실패하는듯 했다.
일부에서는 「아무리 외국에서 오랜 세월 고생을 했다지만 어떻게 자신의 성을 잊을 수 있는가」 「훈할머니가 과연 한국인이 맞을까」 「생김새 등으로 볼때 외국인일지도 모른다」는 등 회의적인 지적까지 나왔다. 정신대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혈육을 찾고 보니 훈할머니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고향마을과 생가 주변 풍경 등에 대한 기억이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귀국후 아버지 이름이 「공문(경상도 발음 공무이)」이었다고 기억해내 한때 「아버지 직업이 공무원이었다」는 오해도 풀렸다.
어머니 성이 장씨, 엿공장과 방물장수를 한 부모직업, 1남3녀의 가족관계 등 처음부터 털어놓은 진술이 사실과 한치의 다름이 없었다.
고희를 넘긴 훈할머니의 기억이 이처럼 생생한 것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뒤 50년이상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고향과 가족들을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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