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첫해 우리 가족은 호텔에서 살았다. 당시 만 네살이던 큰 아들 로빈이 벌인 엉뚱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돼서 우리는 로빈이 밥을 잘 먹지 않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린 녀석이 자꾸 살찌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제과부 주방에 몰래 내려가 협박반 애원반으로 초콜릿, 케이크 등 단 것을 시도때도 없이 얻어 먹는 것이 원인이었다. 여러사람이 3교대로 근무하는 곳이라 우리 애가 하루에 몇번씩 그 곳을 드나들어도 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어느날 나는 지하 2층 제과부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는 아들을 발견했다. 아빠를 보자 녀석은 손에 쥐고 있던 과자를 얼른 뒤로 숨겼다. 둘러대기를 자기가 아르바이트로 아저씨들을 가끔씩 도와드리는데 그럴때마다 수고비 대신 과자를 약간씩 얻어 먹는다는 것이었다. 대충 상황을 짐작하게 된 나는 그날 이후로 로빈에게 제과부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이제는 밥도 잘 먹고 살도 빠지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로빈의 체중은 내려가지 않았고 식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도 이상해 의사에게 데려 갔더니 음식량을 줄이고 지방과 당분 조절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로빈을 위한 다이어트 식단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로빈이 그 맛 없는 다이어트식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음식을 입에 대는둥 마는둥 하는데도 보름이 지나도록 체중은 내려가지 않았다.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우리는 로빈의 자유시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점심식사후 5층 수영장의 야외 베란다에서 한두 시간 놀다 오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선글라스와 모자로 변장을 하고 로빈의 뒤를 밟아 수영장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한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감자튀김 좀 달라고 손짓을 해댔다. 마음 좋은 한국손님인지라 아들에게 감자튀김을 듬뿍 쥐어주었다. 그걸 맛있게 먹고 난 다음 아들놈은 혼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외국인 여성에게 다가가더니 아무말 없이 아이스크림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 손님이 『네 이름이 뭐니』하고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로빈인데요. 우리 엄마, 아빠는 제가 너무 뚱뚱하다고 먹을 것을 안줘요』하면서 울먹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아이스크림 한숟갈 먹겠냐』고 물었다. 이 다음 아들의 대답. 『어떻게 드시는 것을 빼앗나요. 주시고 싶으시면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휘핑 크림을 얹고 아몬드와 땅콩 섞은 걸로 하나 새로 주문해 주시면 몰라도…』
현재 우리 가족은 호텔밖에서 살고 있다. 아들의 먹을 거리를 찾는 모험 반경도 그 만큼 넓어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애의 통통한 얼굴과 뱃살을 떠올리면 갑자기 불안해 진다.<르네상스 서울호텔 식음료이사·스페인인>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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