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보모 출신 81년 ‘세기의 결혼’/찰스의 무뚝뚝함·외도로 갈등/87년부터 공식석상 외엔 ‘따로따로’/96년 위자료 200억원에 이혼세계는 81년 7월29일 영국 런던의 성 폴성당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20세의 평범한 처녀 다이애나 스펜서를 보며 기뻐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97년 8월31일 세계는 파리의 한병원에서 주검으로 변한 다이애나를 보며 경악했다.
이혼후 사랑을 다시 한번 불태우려던 다이애나는 이날 많은 이들의 가슴에 아픔과 연민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전형적인 영국 귀족의 집안인 스펜서공작의 셋째딸로 태어나 자유분방한 청소년시절을 보낸 그가 신데렐라가 된 것은 그의 나이 19세때.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77년 다이애나는 스코틀랜드 왕실사격장에서 찰스왕세자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찰스는 열세살 아래의 생기발랄하고 순수한 이미지의 다이애나를 가슴에 품다 일반인들의 예상을 뒤엎고 81년 7월 많은 사람들의 축복속에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의 결혼식은 전세계로 생중계됐고 다이애나 웨딩 드레스 유행을 낳을 정도로 세계의 관심이 높았다.
다이애나는 결혼 1년뒤인 82년 6월 두사람의 사랑의 결실이기도 한 장남 윌리엄 아서 필립을 낳은데 이어 84년에는 차남 해리 찰스 데이비드를 출산했다. 두사람의 사랑은 세인들로 하여금 시샘과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할 정도로 보였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이애나는 출산과 열세살 연상인 찰스의 내성적이고 무뚝뚝한 성격으로 우울증에 걸렸고 96년 이혼할때까지 다섯차례나 자살을 시도할 만큼 보기와 다르게 불행한 결혼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들부부의 파탄의 결정적인 계기는 찰스가 결혼전부터 사귀어왔던 카밀라 파커볼스와의 관계가 결혼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
이때부터 두사람은 화해할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두사람의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85년 부부관계가 원만치 않다는 언론보도를 기점으로 찰스는 파커볼스와 본격적인 밀애를 즐겼고 다이애나의 화려한 남자편력이 시작됐다. 승마교관 제임스 휴이트, 미국의 록가수 스팅, 영화배우 톰 행크스 등 연일 다이애나의 스캔들이 신문의 지면을 장식했다.
둘은 급기야 87년부터 공식석상외에는 휴가 여행을 따로 갔고 92년 영국왕실이 두사람의 별거를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별거에 들어간 두사람은 외교활동을 비롯한 공식석상에서 조차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찰스가 94년 BBC방송과의 회견에서 자신의 부정을 인정한데 이어 1년뒤 다이애나가 같은 방송에 나가 휴이트와의 정사사실을 시인하면서 사실상 이혼상태로 접어들었다. 96년 8월28일 다이애나가 이혼후에도 왕세자비 칭호를 사용하고 2,200만달러(200억원)의 위자료를 받는 조건으로 이혼발표를 했다.
이혼후 다이애나는 두가지 뚜렷한 행보로 언론과 세인들의 끊임없는 관심의 표적이 돼왔다. 앙골라를 방문해 대인지뢰 희생자를 위로하고 보스니아로 건너가 내전으로 상처입은 고아들을 어루만지는 등 활발한 자선활동으로 영국 왕실의 위엄을 지켰다.
이런 자선활동은 이내 남자들과의 스캔들에 묻혔다. 이혼한지 채 6개월도 안돼 만난 남자가 파키스탄출신의 회교도 심장전문의 하스나트 칸. 다이애나는 칸과 재혼하고 싶었지만 종교적 이유로 이별해야했다. 이어 만난 사람이 문제의 파예드. 파커볼스와 재결합설이 나돌던 찰스에게 복수라도 하듯 다이애나는 파예드와 불같은 밀애를 나누었지만 두사람이 죽음으로써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다.
숱한 사랑과 비난을 한몸에 받았던 다이애나. 그는 지상에 가장 사랑하는 두아들을 남긴 채 애인곁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배국남 기자>배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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