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통한 훈 할머니 감격의 가족상봉/동생 손 꼭잡고 “당장 고향에 가보자”/“아버지 이름 공무이”“이웃들 그렇게 불러”/“엿공장했다” 옛기억 확인하며 환한 웃음29일 유전자감식 결과로 혈육과 고향을 한꺼번에 되찾은 훈할머니는 인천 길병원에서 50여년간 쌓였던 통한을 한순간에 털어버린 듯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감식결과가 통보되자 여동생 이순이(61)씨는 올케 조선애(63)씨와 함께 『그럼 어메가 죽었다던 언니가 틀림없재』라며 언니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꿈만 같다』는 말을 되뇌며 10여분간 통곡한 자매와 올케의 상봉장면은 병실을 꽉 메운 30여명의 취재진과 병원 관계자들의 눈시울까지 흥건히 적셨다.
훈할머니는 동생을 만난 뒤 더욱 기억력이 또렷해지는 듯 했다. 훈할머니는 한 신문사가 고향집 바로 앞에서 와이드로 찍은 마을 풍경 사진을 보여주자 『이 길을 따라 절에 올라갔다』 『오른편에 바다가 있었다』 『이쪽에 그네 등이 있어 동무들과 자주 놀러갔다』며 조목조목 짚어냈다. 이를 지켜보던 순이씨는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언니야 맞다』 『틀림없어』라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이 순이씨 자매는 혈육간의 만남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인터뷰할 때도 두손을 꼭잡고 수시로 뺨을 비비는 등 기쁨을 감추지 못했는데 훈할머니는 지금이라도 당장 동생과 함께 고향집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훈할머니) 『아버지 이름이 「공무이」였다고 기억하는데』
(순이씨) 『맞다. 본래 이름은 이성호지만 아명인지 사람들이 「공무이(공문의 경상도식 발음)」라고 불렀다. 아버지 본래 고향은 경남 합천이었는데 기억하는가』
(훈할머니) 『어릴적 주변에 친척이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나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고향이 따로 있었구나. 여자들이 아버지를 많이 따라 내가 끌려가기 전 일년정도 딴 여자를 두고 살기도 했다』
(순이씨) 『맞다. 사실은 우리 어머니도 후처였고 그 여자는 일년정도 살다 떠났다』
(훈할머니) 『어머니는 나처럼 키가 작고 얼굴이 검은데 아버지는 키도 훤칠하고 얼굴이 크고 희었다. 참 잘 생기셨었다』
(조선애씨) 『시아버님은 정말 한량이셨다. 남편이 시아버님을 많이 닮았었다. 남편 아명이 「뚝때미」였는데 기억나나』
(훈할머니) 『얘기를 듣고 보니 기억난다. 집에서 엿을 만들어 팔았었는데 맞는가』
(순이씨) 『맞다. 엿만들던 기억이 나는가』
(훈할머니) 『집에 할아버지들을 네명정도 두고 엿을 만들어 팔았다. 큰 솥 두개에 쌀을 넣고 오래 끓이면 검은엿(갱엿)이 되는데 이것을 양쪽에서 잡고 한참을 당기다보면 흰색으로 변했다. 할아버지들이 엿을 모판에 담아 큰 가위를 두드리며 팔러 나가면 이 소리를 듣고 동네꼬마들이 몰려들곤 했다』
(조선애씨) 『남편이 어릴적 엿을 고는 솥에 한쪽 손을 덴 일이 있는데』
(훈할머니) 『그런 것 같다. 나는 다리로 알고 있었는데』(할머니는 지난 6월 프놈펜서 가진 인터뷰당시 남동생이 다리를 크게 덴 일이 있다고 말했었다)
(조선애씨) 『남편은 생전에 술만 마시면 「누님에게 편지까지 보냈는데 답이 없는 걸 보니 돌아가셨나 보다」고 통곡했었다. 이산가족 찾기때 찾아나서기도 했다』
(훈할머니) 『그랬었구나. 프놈펜 위안소에서 동생의 편지를 받은 일이 있다. 편지까지 보냈는데 전쟁이 끝난 뒤 왜 나를 찾지 않았는지 원망을 많이 했었는데…』
(조선애씨) 『시어머님께서 방물장수를 할때 무거운 물건을 하도 이고 다녀 머리카락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고 말하시곤 했다』
(훈할머니) 『그럼 맞다. 우리 어머니가 맞다.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조선애씨) 『큰 시누이 덕이언니는 생각나는가』
(훈할머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눈썹위 이마에 깊은 상처가 있었다. 형부는 한쪽눈이 애꾸였다』
(조선애씨) 『맞다. 생전 시어머님께서 「손가락이 병신이라도 병신값을 한다더니 눈구녁이 병신이라 애를 먹인다」며 푸념을 하곤 하셨다』<인천=송원영·이희정 기자>인천=송원영·이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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