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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의 민주화(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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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의 민주화(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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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가고 있고 여름 휴가철이 끝나가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가 『휴가 잘 다녀오셨습니까』요, 올여름 거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골목 식당이나 조그만 가게에 나붙은 <여름휴가로 휴업합니다> 라는 안내문이었다. 휴가가 어느새 전국민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다.내가 20여년전 특파원으로 파리에 갔을 때 당시의 우리나라와 가장 대조적인 생활풍속이 프랑스인들의 여름 바캉스였다. 그때 이미 여름이면 파리의 거리가 텅 비었고 길가에는 카페고 상점이고 <휴가중> 이라는 팻말이 도열하고 있었다. 공연장들은 다 문을 닫았고 신문·잡지도 얄팍해졌다. 빵집이나 채소가게 주인도 카페보이나 매춘부도 파리를 탈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뼈빠지게 일만 하던 때라 바캉스가 바로 선진국의 지표이구나 싶었던 것이다.

유대인은 일요일을 발명하고 영국인은 주말을 발명하고 프랑스인은 바캉스를 발명했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여름 한철을 쉬기 위해 1년의 나머지동안 열심히 일하고 바캉스의 비용을 위해 1년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꼴이다. 바캉스가 곧 인생의 목적이요 즈와 드 비브르(삶의 기쁨)는 오로지 바캉스에 있다는 듯한 극성이다. 이들에게 아우시앵(8월에 바캉스를 떠나지 않는 사람)은 굴욕이나 다름없다.

프랑스인들은 1년의 절반을 다가오는 바캉스 이야기로 지내고 나머지 절반을 지나간 바캉스 이야기로 지낸다고까지 말해진다. 사실 바캉스 철을 전후해서 우체국이나 은행 창구같은 데를 가보면 손님을 길게 줄세워놓고 직원들이 저희끼리 지껄이는 소리가 얼른 듣기에는 무슨 긴요한 업무 의논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온통 바캉스 이야기다.

프랑스에 유급 휴가제도가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1936년 레옹 블룸의 인민전선 내각 때부터다. 처음에는 1년에 2주간이던 것이 차츰 늘어나더니 1984년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 정권때 5주간이 되었다. 최근 한해의 통계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전인구의 56%인 3,100만명이 여름에 바캉스를 떠났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이런 바캉스시대가 오나 했었다. 아직 한달 이상이나 늘어지게 쉴 팔자는 아니더라도 지금 그 시대가 오고 있다. 파리의 여름을 차츰 본떠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바캉스라면 옛날에는 부유층이나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겼던 것이 이제는 전국민의 공유물이 되어 간다. 바캉스의 민주화다. 휴가의 민주화는 노동의 민주화가 가져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경제적 민주화의 진도요 정치적 민주화의 바탕이기도 하다.

모든 국민은 일할 의무가 있고 동시에 쉴 권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국민의 휴가를 저당잡힌 잉여가치다. 이제 그 저당물이 환수되고 있다. 휴식은 노동의 대가요 노동은 휴식으로 보상된다. 휴식이 노동에 상응하지 않을 때 사회적 불만의 요인이 된다. 그러나 휴식이 노동가치에 비해 과용일 때 또한 이그러진 휴식의 민주화는 경제적·정치적 민주화를 위협한다.

휴가시대를 맞아 우리는 60년 전통의 프랑스로부터 바캉스 문화를 배울 것이 있다.

파리 시민들은 휴가 한철을 스페인같은 물가가 싼 곳에서 보내고 오면 오히려 생활비가 파리에 남아 있는 것보다 절약이 된다. 이것이 바캉스의 경제학이다. 실제로 95년에 외국으로 나간 프랑스의 휴가객들은 36%가 스페인, 포르투갈 쪽이었다.

프랑스인들은 그 긴 휴가기간 동안 이름난 피서지의 호화로운 호텔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아니다. 역시 95년의 경우 시골의 부모집이나 친지집으로 간 사람이 34%, 자기 별장(시골농가)이나 친지 별장에서 쉰 사람이 22%, 캠핑이 12%였고 호텔 이용은 7% 정도였다.

프랑스에서는 여름이면 고속도로를 달리는 긴 카라반(캠핑용 트레일러)의 행렬을 보게 된다. 전국에는 9,000여 군데의 캠핑장이 있어서 약 90만개의 텐트를 수용한다. 얼마든지 싼값으로 휴가를 즐길 수 있다.

피서철을 넘기면서 우리 국민들은 자문해 보자. 과연 저마다 푼수와 절도와 안식의 휴가였던가. 행여 사치와 과소비와 과시의 여름은 아니었던가. 한편으로 정부로서도 국민의 휴가를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수용할 노력을 한 적이 있었던가. 캠핑장 하나라도 더 세워 줄 궁리를 언제 했던가. 이제 국민의 휴식을 방치하고 방관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미테랑 대통령 때 여가담당 장관까지 있었다.

휴가의 민주화 시대는 새로운 휴가문화의 정립과 휴가정책의 수립을 요구한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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