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의 변화폭이,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남북관계에서 벌어지는 그런 저런 일들이 원체 급격하고도 다양해서 더러더러 헷갈리기도 한다.잠수함 침투사건은 이미 아득한 먼 옛일처럼 되어 있어 차치해 두고라도, 황장엽사건이 바로 어제 일 같은데 최근에는 또 오 뭣이라나 하는 분이 별안간 자진 월북해서 정치권에까지 한바탕 물의를 일으키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북한이 그다지도 자랑해 온 예술작품 「꽃파는 처녀」의 여주인공이었다는 배우의 신랑이요, 전 외무부 차관이요, 현 이집트대사인 장승길과 승호 형제 일가가 극적으로 망명 길에 올라, 며칠동안 우리 사회가 온통 난리 법석이다.
필자같은 월남자 입장에서는 이번에 미국으로 망명한 저들의 거사를 진심으로 환영해 마지 않지만, 하지만, 월남한 필자로 인하여 지난 50년간 적성분자로 분류되어 시달렸을 북한의 남은 가족들을 생각해보면, 그동안 저이들은 잘 먹고 잘 지내며 우리 가족들을 짓밟고 괄시해 왔겠거니 싶어, 솔직히 일말의 착잡한 느낌을 금할 수 없고 덮어놓고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남북관계라는 것은 지난 50년간도 줄곧 그러했거니와 앞으로도 어차피 이런 류의 별별 대소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갈 것인 즉 이젠 그런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지 않나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종류의 행태에서 이젠 빠져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야, 이번에 망명신청을 해 온 그 장씨 일가족이라나 하는 사람들의 이때까지 북한 사회에서 누린 위상으로 보아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지구촌 단위의 세계전략을 주도하는 미국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정보가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라거나 그런 쪽의 우리나라 전문기관의 소관사항으로 조용히 맡겨두면 될 일이지, 송두리째 휘말려들어 그 무슨 제임스 본드의 탐정물같은 얘기에 흠뻑 빠져들 일은 아니다.
실제로 갑자기 이 일이 터져 온 언론이 시끌벅적한 속에서도 필자는 바로 그 며칠전에 북한 신포지구에서 첫 삽을 뜬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주관의 원자력 발전소 「경수로 기공식」광경을 화면으로 지켜보며 맛 본 뜨거운 감회를 새삼 오버랩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오늘의 남북관계에서 이 두가지 중에(저렇게 북한의 요인들이라 하는 자들이 도망쳐 나오고 혹은 오 뭐라나 하는 자처럼 월북을 하는 행태들과 이 경수로 기공식을 놓고)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인가, 어느 쪽이 진면목인가, 어느 쪽이 진정으로 남북관계의 내일을 향해 바람직하고 종주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 등을 혼자 가만가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 자리서도 다시 한번 여럿이 같이 차곡차곡 생각해 보고 음미해 보자. 신포에서의 그 기공식에는 분단 당사자인 우리나라와 북한 당국을 비롯하여 KEDO의 미국 일본 중국대표들도 참가하였고 비록 제각기 뉘앙스의 차이는 조금씩 있었을망정 이 역사가 앞으로 삼천리 이 강산에 이바지하게 될 큰 몫을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어느 나라나 큰 차이가 없었다. 이미 첫 삽을 뜨는 그 자리에는 우리 기술자와 근로자 7,000명이 북한의 근로자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동참해 있었으며 강원도 동해항에서 신포항까지 모든 관련 기자재와 일상용품을 실은 우리 배가 운항을 하였다. 그리고 위성을 통해 현지에서 방영되는 기공식 현장의 생생한 화면이 우리 안방에까지 속속들이 와닿아 현지에서 복무하는 북한 처녀와 우리 근로자들 사이에도 스스럼 없는 대화가 이뤄지는 것을 사그리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이 발전소가 완공되기까지 우리 남한에서 들어갈 기술자 근로자의 연인원은 물경 10만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50여년동안 막혀 있던 남북간의 벽을 뚫어내는 길이란 모름지기 바로 이러해야 하고, 이 이상 자연스러운 길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모처럼 어렵사리 이뤄낸 요만한 틈새를 앞으로도 더욱 조심스럽게 가꾸어 가는데 모든 슬기를 모아가야 할 것이다.
개방이니, 개혁이니, 어려운 용어들을 쓸데 없이 남발해서 북쪽 사람들로 하여금 거북살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되도록 저쪽 사람들의 이야기에 차분하게 귀 기울여주면서 이쪽대로의 사는 방식을 실제 모습으로 보여주는데 신경들을 써야 할 것이다. 그쪽에서 즐기는 토론일랑 그 쪽에 그냥저냥 일임해 두고 맡겨둔채. 잘난척 하고 떠들어 대며 가르쳐 준답시고 상대편으로 하여금 무안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냥 이쪽 삶의 양태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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