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이승만 라인’ 선포이후 3차례 ‘정부견해’ 공방/77년 일 총리 영유권 발언/80년 양국 밀월시대 지나 90년대 다시 재연조짐독도를 둘러 싼 영토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기본 시각이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도 우리 영토이고, 현재 실효적 지배를 계속하고 있는 만큼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귀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나 일본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때마다 양국간의 신경전이 거듭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독도에 대한 양국간 논쟁이 시작된 것은 52년. 한국 정부는 4월 28일의 「샌프란시스코조약」(대일 평화조약) 발효를 3개월여 앞둔 1월18일 한반도 주변 해역에 대한 주권 범위를 선포했다. 이 「평화선」, 또는 「이승만 라인」에 독도와 그 주변 바다가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월28일 『일본 영토인 이 섬에 대한 한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항의문을 우리 정부에 보내 왔다. 우리 정부는 2월12일 반박 항의문을 일본 정부에 보냈고, 이를 일본 정부가 반박하면 다시 반박하기를 반복했다.
이런 외교 공방의 한편에서는 독도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53년 6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30여명의 관리와 경찰을 독도에 상륙시켜 「일본령 다케시마(죽도)」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게시판을 설치했다. 일본측의 이런 행동과 관련, 울릉도 민간인들이 독도의용수비대(대장 홍순칠)를 조직해 독도 경비에 나섰다. 또 해양경찰대 순시선도 파견돼 일본 선박에 대한 경고 발포가 잇따랐다.
우리 정부는 54년 5월 관리와 석공을 독도에 보내 일본이 설치한 표지판을 철거하고 동도 절벽에 「한국령」이라는 글자와 태극기를 새겨 넣었다. 또 56년 12월 해양경찰대가 독도에 상주, 공식적인 경비임무에 들어 갔다.
그런 가운데 양국 정부는 독도 영유권의 역사적·국제법적 정당성을 다투는 본격적인 논쟁을 벌였다. 52년 7월 일본이 장문의 「정부 견해」를 보내 오면서 시작된 논쟁은 이후 59년 1월 한국측의 3번째 「정부 견해」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 논쟁은 일본이 62년 7월 네번째 「정부 견해」를 보낸 데 대해 한국이 65년 12월 『더 이상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답변으로 깔아 뭉개면서 흐지부지 끝났다. 그러나 이 세차례의 「정부 견해」 공방의 내용은 오늘날까지도 양측 독도 영유권 주장의 논리적 기초가 돼 있다.
일본은 이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독도 문제」를 들고 나오다가 한일기본조약 발효 후 66∼68년에는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69년 8월15일 순시선 파견 이래 매년 순시선을 독도 근해에 파견하는 등 애써 항의의 흔적을 남겨 왔다.
70년대 독도문제와 관련, 특기할 만한 것은 77년 2월 후쿠다(복전) 당시 일본총리가 국회에서 행한 독도 영유권 발언. 국내 여론이 들끓었고 우리 정부는 물론 북한까지 대일 비난에 나서 「2차 독도 영유권 분쟁」 비슷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80년대 양국 밀월시대를 맞아 「독도」는 조용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일본은 배타적 경제수역(EEZ) 설정을 의식해 독도 문제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했다. 특히 95년말 독도 접안시설 공사를 계기로 한 「3차 영유권 분쟁」의 조짐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황영식 기자>황영식>
◎일 영유권 주장 허점투성이/독도인지 우리가 빠르고 영토 포기한적도 없어
『다케시마(죽도·독도의 일본명)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일본측이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는 △한국 문헌이 독도 명칭 등에 혼란을 보이는 반면 일본 문헌은 독도의 존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한국측이 울릉도에 대해 오랫동안 공도정책을 편 데서 보듯 독도 경영을 포기했지만 일본은 체계적인 독도 경영을 계속해 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 「국제법적 근거」로는 △1905년 2월 시마네(도근)현 고시를 통해 독도에 대한 선점 절차를 마쳤고 △이에 대해 한국측은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으며 △1952년 발효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해야 할 지역」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따라서 52년 한국의 독도 영토편입과 이후의 「점거」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 일본 주장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의 주장은 허점 투성이다. 우선 역사 문헌에서 우리는 일본보다 최소 200여년 앞서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울릉도에서 맑은 날 육안으로도 볼 수 있지만 오키(은기)섬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독도의 존재를 우리 선조가 일본인들보다 늦게 알았을 리가 없다.
또 15세기초부터 1881년까지 공식적으로 공도정책을 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관청에 의한 정기적인 순찰의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는 영토 정책의 한 형태일 뿐 영토 포기로는 볼 수 없다. 일본인이 공도정책의 틈을 타 17세기에 울릉도에서 목재를 채취했고 지나는 길에 더러 독도에서 강치잡이 등을 행한 기록은 있다. 그러나 안용복의 항의로 1696년 에도(강호) 막부가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한 이후 일본의 「독도 경영」 흔적은 없다.
한편 1905년 2월의 「시마네현 고시」는 한국측에 통보되지 않은 것은 물론 일본 중앙정부의 관보에조차 게재되지 않았다. 한국측이 이 사실을 안 것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후인 1906년 들어서였다. 결국 「시마네현 고시」는 「몰래 속여 빼앗은 행위」이거나 「제국주의 침략과정의 일환」일 뿐이어서 카이로 협정에 반환을 규정한 「강탈한 영토」에 해당한다.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이런 반박이 단순히 한국 정부나 학자들의 것이라면 일본으로서도 할 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조차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욕의 부활」이라고 공격하고 있어 우리측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1960년 가와모토 히데요시(천본수길)는 『시마네현 고시는 일개 지자체의 결정을 지방민에 알리는 것일 뿐 결코 국가의 대외적 의사표시가 아니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 또 가지무라 히데키(미촌수수)와 호리 가즈오(굴 화생)도 각각 「독도 문제와 일본 국가」(1978년), 「1905년 일본의 독도영토편입」(1983년)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일본 영유권 주장의 맹점을 파헤쳤다.<황영식 기자>황영식>
◎‘국제법 호소’는 일 노림수/역사적 정통성보다 실효절차 중시 판례 따라/일,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영토편입 주장/1953년 불·영 멩키에르군도 판례가 본보기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측 주장 가운데는 『권위있는 국제사법기관에서 상호 주장의 정당성을 가리자』는 것이 있다. 일본은 이에 대한 한국측의 침묵을 「뒤가 구리기 때문」이라고 몰아 세우기도 한다.
일본의 노림수는 무엇인가.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 주장의 핵심은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에 의한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이다. 당시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은 국제법상 「공시와 통고」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통념과는 달리 서구의 국제법학자들은 「통고」의무를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영토 취득에 있어서 일방적인 행위보다는 당사국간의 동의, 또는 제3국의 승인을 중요시하는 경향은 극히 최근의 것이다. 국제사법기관이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인정하던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일본이 심지어 『한국이 침략이라는 지독한 언어를 사용, 간접적으로 일본의 독도에 대한 「실효적 점유」를 인정했다』고 주장하면서까지 「실효적 점유」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국제사법기관이 제국주의 침략의 부당성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돌다리도 두드리는 신중한 태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통념과 국제법적 판단의 괴리는 1953년 「멩키에르 및 에크레오 군도 판례」에서 쉽게 확인된다. 멩키에르와 에크레오군도는 프랑스 노르망디반도 코앞에 점점이 모여 있는 무인 암초군으로 오랫동안 노르만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13세기 영국과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 과거 노르망디공의 영토를 모두 프랑스에 넘기기로 했으나 이 암초군의 이름은 명기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당연히 자국령이라고 생각해 아무런 행정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사이 어업적 가치를 알아 챈 영국은 19세기 이래 치밀한 행정조치를 취했다. 인근 해역에서의 굴채취가 중요해 지고 어업협상으로 양국이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1869년 첫 분쟁이 시작돼 2차대전때까지 수차례 외교문서가 교환됐다. 영국은 일관되게 자국 영토임을 주장한 데 반해 프랑스는 두 군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다가도 때로는 「중립지」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1945∼50년에 분쟁이 재연, 최종적 판단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구하게 됐을 때 ICJ는 프랑스의 역사적 정통성 주장보다는 영국이 취해 온 치밀한 실효적 행정절차의 증거를 중시했다. 또 프랑스가 이런 조치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던 것을 영유권 포기라고 판단했다. 프랑스로서는 기막힐 노릇이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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