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요체는 ‘민족주의적 평화통일’/존경한다는 후손들은 허상만 좇는듯안두희에 의해 백범이 비운의 생을 마치자, 엄항섭은 백범의 서거를 「달은 하나지만 뭇 강에 도장처럼 자신의 모습을 박아내는 월인천강이라 표현하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반 국민들로부터 정치지도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범을 존경하니 과연 그의 월인천강은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왜 또 다시 백범인가?
세상에서 백범을 존경하는 이들의 이유는 다양하다. 국민학교 문 앞에도 못 간 사람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된 입지전, 맨 살을 잘라 피를 절명에 이른 아버님께 바친 순박한 효심, 낮에는 자신의 그림자를 벗하고 밤에는 자신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자야했던 민족지도자의 고독, 동가숙서가식의 방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추진한 불굴의 투사 등등의 면모는 「백범일지」에 진솔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 우리가 되새겨야 할 백범 선생의 요체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민족을 위한 적과의 화해」라고 생각한다. 백범은 일찍이 상놈의 서러움에 겨워 갑오농민전쟁때 「애기 접주」로 양반 토벌의 최선봉에 선 적이 있으며, 당시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토벌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진영은 탕평적인 화해에 이르게 되고 이로해서 양반이냐 상놈이냐는 계급의식 이상의 차원, 즉 일제의 위협에 놓여있는 조국과 민족문제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이후 백범은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백범은 상하이(상해)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하면서 파란만장한 공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여러 국내외 민족운동세력 중 주로 노장층과 우익계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백범의 노선은 해방 직후에도 계속되었다. 해방직후 국내 정세는 얼마 안 있어 좌우·남북 대립으로 치달았다.
1946년초 백범과 임시정부를 추종하는 특별행동대 「백의결사대」는 북으로 올라가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절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강량욱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딸과 식모, 경비보초 등을 사살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해서 북한은 한때 백범을 「개(김구)」로 고쳐 부를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위기를 목도하면서 백범은 좌우·남북대립의 구도 속에서 유실되었던 민족문제에 다시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다시 「민족을 위한 적과의 화해」를 주장하면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여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호소하였다. 이러한 남북의 평화통일이야말로 백범의 민족주의의 마지막 진수였다.
만년의 이러한 대전환으로 정치적 몰락을 우려하던 측근에게 백범은 담담하게 서산대사의 선시를 휘호로 남겼다.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 갈 때(답설야중거)/ 함부로 난삽하게 걷지 말 지어다(불수호란행)/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금일아행적)/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수작후인정)」 이처럼 만년의 백범은 눈보라치는 조국의 위기에 당면하여 일신의 안위나 현실정치의 이해관계보다는 후손들에게 남길 역사를 강조하였다. 이후 백범이 노래한 시와 글도 모두 「자주적 평화통일」로 요약되거니와 그의 죽음도, 그의 부활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한 열린 민족주의, 이것이야말로 엄항섭이 추모한 월인천강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 남아있는 백범의 모습은 어떠한가. 정치적 입지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위해 백범을 거론하면서도 그 생애의 총 귀결점인 「평화통일의 민족적 백범」은 허다하게 유실되어 있는 실정이다.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오류를 수정할 줄 알며, 소인배는 위인의 수정되지 못한 오류를 추앙한다고 했던가. 백범은 자신의 미진한 바를 민족 앞에 바로 세웠으되, 추앙한다는 우리는 백범을 다시 거꾸로 세우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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