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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을 민다는데…(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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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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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이 내게 묻는다. 『조순 시장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맡았습니까』 이런 질문은 두가지 면에서 나를 불쾌하게 한다. 이제 겨우 정치의 때를 벗고 신문에 글도 쓰고 방송에 출연도 할 수 있게 된 사람을 출발부터 못살게 만들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고 또 하나는 조순 시장의 측근들의 눈에 내가 얼마나 못마땅한 사람으로 비치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여러 해 조순 시장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보려고 애쓴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줄 알고 있는데 그런 이들의 눈에 내가 얼마나 제 주제를 모르는 인간처럼 보이겠는가.나는 한번도 그런 제의를 받아본 적도 없고 따라서 수락한 적도 없다. 나는 4년의 정치생활에서 내 역량을 발휘해 볼 기회를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다만 중상과 모략, 배신과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비결이나 하나 터득했다고 할까. 물론 60년 쌓아올린 나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내동댕이 치고 청와대에라도 들락날락하면서 일을 꾸며봤으면 혹시 어느 수준의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어쨌건 나는 정치판에서의 실패작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얼음판이나 다름없는 정치판에서의 4년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구당의 위원장으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출마도 하고 당선도 되었다. 14대 대통령선거에는 한 정당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맡아 전국을 누빈 적도 있다.

지구당 창당대회, 개편대회에는 수도 없이 참석하여 축사도 하고 격려사도 하였으며 다 무너져가는 한 정당의 대표가 되어 당무회의 등을 무수히 주재하여 의사진행에는 도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정치가 없는 나라에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깨닫고 미련없이 정계를 떠난 것이었다. 그런 내가 정치에 다시 끌려들어간다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조순 시장의 출마로 새롭게 사자구도가 되어 이번 대선에서는 네 사람이 뛸 모양인데 내가 그중에서 누구를 지원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난 21일 내가 맡아하는 모 방송사 AM라디오의 「안녕하십니까 김동길입니다」라는 생방송 프로에 김대중 후보가 나와서 나의 손을 잡으며 미소어린 얼굴로 『김교수만 도와주면 이번엔 내가 틀림없이 당선됩니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농담이다. 비밀투표에서 누구를 찍었던 것을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71년 대선에서 김대중씨에게 표를 던진 것은 사실이다. 「3김 낚시론」으로 사이가 좀 서먹서먹해졌겠지만 70년대에는 그가 누구보다도 선두를 달리던 민주화의 투사였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유신체제하에서, 그리고 군사독재하에서, 그와 내가 호흡을 같이 했던 사실도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나는 87년 대선에선 김영삼씨를, 그리고 92년 대선에서는 정주영씨를 지지하였다. 김대중씨가 납치되었다가 풀려나 자택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찾아가 위로를 하였고 그가 워싱턴 교외에 망명중이던 때에도 안기부 모르게 잠시 찾아가 면담한 적이 있었으니 그와 나의 거리가 먼 것만은 아니다.

김종필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는 내가 틀림없이 그를 지지할 것으로 믿고 있을 것이다. 입장은 서로 달랐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정이 깊고 또 그의 사람됨의 예술성을 나만큼 옳게 감상할 수 있는 사람도 주변에 없기 때문이다.

조순 시장은 물론 나의 어렸을 적 친구이다. 그가 2년전 서울 시장에 출마했을 때 그를 적극 지원한 것은 사실인데 그때에는 나의 사정이 친구 조순을 도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그를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그러려면 언론에서 차지한 내 발판을 또 버려야 할 것이 사실 아닌가.

그가 뜨는 까닭은 꼭 한가지 뿐이다. 정치와 정치인에 식상한 국민이 찍을 수 있는 후보 하나는 있어야 92년 대선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재건이 이 나라 정치의 최대과제라는 사실도 조순 후보를 돋보이게 하는 이유중 하나일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내 마지막 꿈은 야권의 후보단일화에 있다. 지금은 몇사람이 출마하건 투표당일에는 야권에 후보 한 사람만이 남아야 한다는게 나의 바람이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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