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만 위기불감증 “시장원리” 타령/돈 풀어도 불안심리탓 흐름은 왜곡자금시장의 대혼란속에 기업과 금융이 공멸위험에 직면, 모든 시장참여자들이 현 상황을 「비상시국」으로 규정하는데도 유독 정부만 위기를 부정하고 있다. 당국의 안이한 상황인식과 「흙탕물엔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보신적 행태, 특히 원론적 시장주의에 대한 정책결정권자들의 맹신이 오히려 금융혼란을 부채질한다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22일 금융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가 발표한 금융시장 안정대책은 핵심을 한참 비켜간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달러당 9백원벽을 돌파했던 환율과 연 13% 후반까지 치솟았던 콜금리는 정부의 긴급자금방출로 진정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금융권 딜러들은 『불안요인이 일시 잠복된 것』이라며 금리·환율 재반 등을 장담하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시장안정책이란 돈을 푸는 것이 사실상 전부다. 그러나 혼란이 시중유동성 부족 탓이라면 자금방출로 진정되겠지만 현 위기의 본질은 돈으로 막을 수 없는 「시장불안심리」란 지적이다. 은행은 돈이 남아돌아도 종금사에 콜지원조차 기피하고 있으며 종금사도 기업을 상대로 「마녀 사냥식」 여신회수에 나서고 있다.
무려 5조5천억원의 돈을 풀었는데도 은행―종금―기업의 「마의 트라이앵글」은 깨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금융권 고위인사는 『돈을 푸는 것은 정책도 아니다』며 『이는 전쟁위기설이 돌아 시민들이 라면사재기를 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불안감을 없애 주지 않고 그저 라면공급만 늘려주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현 단계에서 가장 확실한, 그리고 유일한 시장안정책은 불안심리 제거다.
돈이 돌지않는 상태에서 통화를 추가공급할 경우 오히려 인플레만 부추긴다. 실제로 정부가 금리안정을 위해 원화자금을 대량지원하자 은행들은 이를 달러사재기에 소진, 22일 환율이 반등하는 역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외환보유고가 넉넉지 않은데도 달러방출을 늘릴 경우 외환위기방지와 환율의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잃을 수도 있다.
금융시장 불안심리의 요체는 「정부가 시장을 방치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위기를 위기로 보지 않는 정부, 그래서 대기업이 연쇄도산하고 금융기관조차 부도직전 상태에 처했는데도 「당사자가 알아서 할일」이라고만 되풀이하는 당국의 무관심과 무대응이 바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A은행 임원은 『지난 6개월여 동안 일이 터지기만 했지 매듭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며 『한보든 기아든 한은특융이든 하나라도 조기에 마무리되지 않는한 불안감은 제거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한보이후 경제위기에 대해 정부가 한 일은 오로지 「시장원리대로」란 말 뿐이다. 부실기업처리가 한없이 지연되고 한은특융도 결론없이 토론만 거듭되고 있다. 한 경제계 인사는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은총재 김인호 청와대경제수석 등 최고당국자들은 한결같이 경제이론가(economist)가 됐고 실질적인 정책을 만들거나(policy-maker) 이를 실천하는 행정가(activist)는 하나도 없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강조하는 「시장원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시장개입에 따른 부담을 회피하려는, 마치 「옷에 때를 묻히지 않고 굴뚝청소를 하겠다」는 얄팍한 보신주의적 발상이란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시장이 없는데도 시장원리를, 구조가 깨지는데도 구조조정만 외치는 정책당국은 마치 「시장」을 현실경제 아닌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모습이다.
정부는 내주중 추가 시장안정책을 발표할 예정이나 이미 실기했다는 평가도 있다. 만약 이 대책에 부실기업조기처리 및 특융 등 시장불안심리 제거방안이 포함되지 않고 또다시 그저 손쉬운 자금공급확대 정도로 그친다면 경제는 치유불능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게 금융권 지적이다.<이성철 기자>이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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