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물을 끓이려니 어디서 벌레 울음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마치 내 마음이 소리를 내고 있기나 한 것처럼 그 소리는 가만히 가슴 밑바닥을 긁는다. 그렇구나, 벌써 가을이 오고 있구나. 나는 커피를 홀짝거린다. 참 맛있다.아, 여름이 가버렸구나. 그 시간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가슴을 긁는 나를 위로나 하듯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벌레들은 어디 가득 차 있다가 저리도 때맞춰 세상을 다정하게 울어주는 것일까. 그중에 유난히 큰 벌레소리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건다.
『지난 여름은 고통스러웠지요?』
『그래,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지. 사회적으로도 KAL참사 같은 대형 비행기 사고도 일어났었고…. 그런데 참, 억울하게 죽은 그 많은 승객들은 어떻게 하지? 졸지에 일을 당한 그 가족들은? 그런데 너는 그런 참사가 도대체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나는 벌레소리에게 묻는다. 벌레소리는 가는 한숨과 함께 대답한다.
『…글쎄요. 인간들의 일은 잘 모르긴 하지만…. 그렇지만 그 참사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너무 빨리 가려다보니, 또는 보다 많이 움켜쥐려다 보니 난 사고였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요? 아, 정말 인간들은 얼마나 더 빨리, 그리고 얼마나 많이 달리고 움켜쥐어야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요?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혹 기억하시는지요?』
「한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자취를 싫어하여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달아나는데 발걸음이 잦을수록 발자취가 많아지며 달아나는 것이 빨라질수록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자기 걸음이 아직 더딘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 사람은 더욱 기를 쓰고 달린다. 그러다 결국 그 사람은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만다. 그 사람은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멈추어 있으면 발자취가 사라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그러자 뒷산에서 바람에 출렁이던 나뭇잎 하나가 끼어든다.
『하긴 「집」보다 「집 평수」 「집값」이 중요한 인간들의 세상이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은 말하자면 여름이란 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요. 그러나 여름은 결코 가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을도 결코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름 속에 이미 가을은 들어 있었고, 또 가을 속에는 이미 여름이 들어 있는 것이죠. 물론 겨울도, 봄도…. 이제 잠시 가을이 여름과 자리를 바꿔 앉을 거예요. 가을은 모든 것을 덮어줄 것입니다. 자기의 저 부드러운 숨결로, 부드러운 태양으로, 부드러운 생명의 낙엽으로. 많이 쥐려고 하지 않는 한 죽음은 항상 삶이 될 거예요. 아름다운 이 지구에서…』
나뭇잎은 그렇게 말하며 나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는다. 가을이 온다느니, 여름이 갔다느니 말한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커피를 홀짝거린다.
『너희들은 인간들이 사는 사회를 몰라. 우리 인간들의 사회는 이제 너무 복잡하단다. 연말에는 대선이라는 것도 있어.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아니?』
나뭇잎이 살랑거리며 다시 이야기에 끼어든다.
『이규보가 자기집에서 키우던 바둑이에게 쓴 글 중에서 「짖거나 물어도 좋다」고 한 것을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허실을 엿보고 부주의한 틈을 타서 담을 뚫고 집안을 들여다 보며 재물을 탐내는 사람이 있거든 너는 지체하지 말고 짖고 빨리 물어야 한다. 겉모양은 기름처럼 부드러우나 속마음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어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염탐하면서 그 악랄함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얌전하게 선웃음을 치면서 오거든 너는 짖어야 한다.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면서 사람 눈을 속이려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여 사람을 유혹하고 현혹시키는 늙은 박수나 음탕한 무당이 문을 열고 찾아오면 너는 물어야 한다. 너는 그릇에 고기가 있어도 훔치지 말고 솥에 국이 있어도 핥지 말아야 하며, …잠자는 일도 즐기지 말라」
나뭇잎의 말이야 어떻든 이제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아름다운 성숙이 오고 있다. 생명은 그렇게 한번 익어야 함을 보여주는 그런 가을. 이제 당신은 저 가을의 손을 잡아야 하리라. 조용히 머리 숙이는 열매들의 지혜를 바라보면서 가을 하늘에 더욱 화사하게 지는 해를 대면하여야 하리라. 그러면 거기 당신의 꿈도 고개를 숙이고 오리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