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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 인각사(차따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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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 인각사(차따라:16)

입력
1997.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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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최고기록’ 삼국유사의 탄생지/일연 스님이 말년을 보낸 곳/삼국유사엔 가락·신라의 차 기록이 7차례나 등장/우리 차역사 크게 앞당겨「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1206∼1289) 추모다례제가 지난 10일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에서 열렸다. 스님의 708번째 기일을 맞아 열린 이날 다례제는 인각사가 댐건설로 수몰위기에 몰렸다가 극적으로 살아 남게 된 것을 자축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진종일 장대비가 내렸지만 300여 추모객들의 표정은 밝았다.

10년만에 찾은 인각사는 황폐한 옛모습을 털어내고 있었다. 절앞을 가로지르는 지방도는 깨끗하게 포장됐고 입구 오른편에 마련된 주차장에는 연신 승용차가 드나들고 있었다. 오랫만에 보는 활기였다. 금방 폭삭 내려앉을 것 같던 극락전과 명부전은 새 기와로 단장을 했고 낡을 대로 낡았던 입구의 요사채가 뜯겨 나간 자리에는 강설루가 들어 섰다.

그래도 오랫동안 망각의 늪에 묻혀 기울어 간 절의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사실 「삼국유사」의 산실이니, 차문화의 성지니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동안 이 절만큼 철저히 소외받은 유적지도 드물었다. 이미 오래전에 대웅전이 사라졌을 정도다. 높이 199㎝, 너비 98㎝였던 스님의 비(보각국사비)는 깨지고 마모돼 80여㎝ 높이의 세모꼴 파편만 비각속에 남아 있다. 지금 명부전 앞에 있는 스님의 부도탑(보각국사정조지탑)은 원래 절에서 동쪽으로 1㎞가량 떨어진 화북3동 부도골에 있었다. 부도골은 일제때 일인들에 의해 쑥밭이 됐고 나중에 명당자리라고 해서 대구 모씨가 가족 묘자리로 삼았다.

파괴돼 흩어진 부도탑을 58년 3월 지금은 작고한 사학자 이홍직 교수가 발견해 절안으로 옮겨올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었다.

빈약한 재정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발만 구르고 있던 인각사. 작년초 건설교통부가 인각사 들머리에 댐을 세울 계획을 발표하면서 의외로 중흥의 계기가 마련됐다. 수몰 위기를 앞두고 불교계와 문화계에 인각사 살리기 운동이 번져 나갔다. 결국 건교부가 절 동쪽에 댐을 세우기로 계획을 바꾸어 인각사는 가까스로 「수장」 위기에서 벗어났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삼국시대 차문화를 어디서 찾아볼 것인가. 「삼국유사」의 산실인 인각사는 그래서 차인들에게는 제1의 성역으로 꼽히고 있다. 삼국유사 전편에 7차례나 등장하는 차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의 차문화는 한결 삭막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삼국유사」 권2의 경덕왕과 충담스님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차기를 넣고 메고 다니는 야외용 다구나 앵통(벚나무로 만든 차통)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삼월삼짓날 충담스님이 경주 삼화령에서 미륵부처에게 올렸던 차례는 오늘까지도 차인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아니면 수로왕의 비인 허왕후의 차얘기는 찾을 길이 없다. 특히 신라 30대 법민왕(시호 문무왕)이 서기 661년에 끊어진 수로왕 종묘에 차와 술, 과일 등으로 차례를 계속 지내도록 한 기록은 제례에 차를 썼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인 동시에 우리의 차역사를 2000년전까지 끌어 올린 중요한 사료가 돼 있다.

삼국유사 권 3에는 보천·효명 두 왕자가 오대산에서 차를 달여 5만 보살에게 공양했고 도를 깨친 보천이 1만 진신보살에게 차를 공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권 5에서는 월명스님이 도솔가를 지어 괴변을 물리치자 왕이 품차 한봉과 수정염주를 주었다고 적었다. 이처럼 「삼국유사」에 7차례나 등장하는 차관련 기록은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인각사와 일연스님과의 인연은 창건된 지 600여년 후 고려 충렬왕때 국사의 지위에 오른 스님이 노모가 있는 이 절에 주석하면서부터.

79세에 어머니가 96세로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은 이 절을 스님의 하안지지로 정하고 전답 100여경을 하사한다. 스님은 5년을 머물다 타계하지만 「삼국유사」를 비롯한 불교서적 100여권이 이 절에서 태어난다.

절은 조선 효종(1649∼1659)때 중수되고 숙종 25년(1699)에 증축돼 대가람의 틀을 갖추었으나 그 이후 역사속으로 퇴락해 간다.

비바람에 슬린 스님의 비는 심하게 마모돼 그 내용을 짐작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지난 79년 박영돈씨(애서가협회 부회장)가 비문(전면)의 탁본을 발견해 전체를 복원했다. 그는 인각사 복원을 강력히 주장했다. 『선진국에서는 지금 자기고장 출신 시인과 작가, 음악가나 화가들이 살았던 집은 물론 그들이 산책했던 오솔길과 자주 다녔던 술집, 심지어 예술적 영감을 얻었던 숲이나 호수까지 정성스레 가꾸고 보존하고 있지요. 민족의 역사가 찬술된 현장을 그토록 황폐하게 방치한 우리들 자신이 부끄러울 수 밖에요』

지난해 여름부터 절을 맡은 주지 대원스님은 대웅전과 탑비의 복원, 유사관과 청소년수련관의 건립 등 절을 중창할 원을 세우고 있다.

84년 12월 8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절 입구에 세운 시비에 남은 스님의 7언절구. 「즐겁던 한 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한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이제 알았노라」(쾌적수유의기한 암도수리로창안 불수경대황량숙 방오로생일몽간)<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차입문/차안의 카페인,카테킨과 결합/부작용 없어지고 성인병 예방

왜 차를 마시느냐는 물음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즐겁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되풀이한다.

차의 신인 신농씨는 「식경」에서 「차를 오래 마시면 사람에게 힘이 생기고 마음이 즐거워 진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판매되는 1.5ℓ짜리 PET병 차에는 열량이 1㎉ 미만이라고 씌어 있다. 신농씨는 열량도 없는 차를 마시는데 왜 사람에게 힘이 생긴다고 했을까.

이에 대한 오늘날의 답은 이렇다. 차에는 육제적 피로를 회복시키는 성분인 비타민C나 비타민E 등의 비타민과 유해한 체내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떫은 맛의 카테킨, 이뇨와 강심작용을 하는 쓴맛의 카페인 등이 다량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 즐거워지는 이유는 차에 들어 있는 다소인 카테킨과 자연을 담은 향이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또 차의 카페인은 커피의 카페인과 달리 인체에 무해할 뿐 아니라 강심작용을 한다. 녹차에는 커피에 들어 있지 않은 카테킨과 데아닌이 카페인과 결합해 불용성 카페인을 만들기 때문에 커피와 같은 부작용이 없다.

육체의 피로와 마음의 긴장을 차 한잔으로 풀 수 있으니 현대인의 스트레스 해소와 성인병 예방에 차만한 마실거리가 없다. 그래서 흔히들 차를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음료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차를 마시는 사람은 장수한다. 은사이신 고 정산 한웅빈옹은 미수(88세)의 나이까지 지방 강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진주의 서예가이자 차인인 은초 정명수옹은 89세의 나이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부산의 금당 초규용 선생은 올해 96세의 나이로 차문화계를 이끌고 있다.

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스님은 여든의 나이, 추사 김정희는 일흔의 나이까지 살았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50을 넘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의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차에 담긴 항산화 비타민인 비타민C와 비타민E, 떫은 맛의 카테킨은 노화를 촉진하는 과산화 지질을 억제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에 「불로장생의 묘약」으로 부풀려 알려진 DHEA가 있다면 우리에겐 효능이 무궁하고 부작용이 없는 TEA가 있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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