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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 주축 광복때까지 임정 지원/하와이 한인단체 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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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 주축 광복때까지 임정 지원/하와이 한인단체 독립운동사

입력
1997.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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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소규모 친목단체서 1909년 ‘국민회’로 통합/이승만 등장후 교민단·동지회로 분열/1932년 국민회 재건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무게는 지금껏 과소평가돼왔다. 하와이 한인들의 자금지원이 없었다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항일투쟁이 제대로 수행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백범도 「백범일지」에 자세히 적고 있다. 한인단체들의 분열과 갈등, 통합과 협력이 끊임없이 반복됐지만 하와이 한인들의 임정 지원은 광복때까지 지속됐다.

1903년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이민 1세대들은 초기에는 종교나 출신지역별로 조직된 소규모 친목단체를 점차 애국단체로 발전시켜나갔다. 대동보국회 혈성단 등 난립하던 하와이 애국단체들은 이민 4년만인 1907년에야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됐다. 한인합성협회는 미국 본토의 애국단체와도 뜻을 모아 1909년 「국민회」로 거듭 태어났다. 국민회는 이듬해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고 미국본토와 만주 시베리아에 지방총회를 두고 해외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국민군단 창설과 독립자금적립 등으로 하와이 독립운동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인 1913년. 이승만의 등장은 하와이 독립운동 단체의 갈등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호형호제하던 박용만과 국민회 초청으로 하와이에 온 이승만은 국민회의 주도권을 장악한뒤 1921년에는 지지자를 규합해 동지회를 만들어 국민회와 결별했다. 호놀룰루연합감리교회 이동진 목사는 『각종 사료에는 많은 국민회원들이 이승만 박사를 따라 동지회로 옮겼지만 곧 실망하고 국민회로 되돌아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회는 임시정부의 교민단 설립령에 따라 하와이대한인교민단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고 주도권 싸움에서 밀린 박용만은 중국으로 옮겨 독립운동을 하다 그를 친일파로 오해한 동포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이승만은 다시 교민단이 감리교회 건축비용을 남용했다고 비난하며 제기한 소송에서 패하자 1931년 하와이를 떠났다. 그는 소송에서 지면 하와이를 떠나겠다고 공언했었다.

이승만이 하와이를 떠난 이후 교민단은 국민회로 다시 이름을 바꾸고 광복때까지 임정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동지회도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를 중심으로 태평양주보를 발행하며 명맥을 유지했다.<호놀룰루=이상연 기자>

◎쿠바·멕시코서도 독립운동 있었다/임천택·홍언 선생 중심 광복군 등에 기금지원

이번 광복절 기념식 서훈대상자에는 당시로서는 오지나 다름없었던 쿠바의 독립운동가도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임천택(1903∼1985) 선생이 그 주인공. 임선생은 두살 때인 1905년 가족과 함께 멕시코 애니깽(용설란) 농장으로 팔려갔다가 21년 350여명의 동포들과 함께 쿠바로 옮겨갔다. 쿠바 정착후 대한국민회 쿠바 지방회 서기직을 시작으로 53년까지 총무, 회장 등을 지내면서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38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맛탄사스 지부 고문으로 위촉됐고,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미주지방 의원 등을 지냈다.

재쿠바 한인들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37년부터 45년까지 돈을 모아 광복군 군자금으로 지원하자 백범은 『임시정부를 도운 쿠바 동포』라며 「백범일지」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임선생은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85년 쿠바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뒤늦게나마 그의 공로를 인정, 이번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주기로 결정했다. 훈장은 9월에 열릴 「한민족축전」에 참가하는 선생의 아들 은조(71·전 귀테라스 시 인민정권위원회 위원장)씨가 부친을 대신해 받게 된다.

남미에서 독립운동이 벌어졌던 곳은 쿠바뿐이 아니다. 홍언(1880∼1951) 선생은 당시 미주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하와이를 떠나 멕시코 페루 칠레 등 남미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서 한인합성신보, 신한민보 등을 통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국을 빼앗긴 울분을 표현한 시도 100여편이나 남겼다. 이외에도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는 등 분열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부흥과 미주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힘을 쏟았다. 1928년 이후로는 당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주류였던 이승만계와는 길을 달리하여 민족주의 노선을 지원하고 백범의 한인애국단을 적극 후원하였다.

독립운동 지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파나마 에쿠아도르 페루 칠레 등 중남미 지역을 순회하며 한인들뿐 아니라 중국 화교들에게서까지 기금을 모았다. 특히 독립운동의 한·중 합작을 제창, 한인과 화교간 교류활동을 활발히 벌여 「미국화교사」에도 이름이 기록돼 있다.

지난 8월5일, 홍선생은 조국을 떠난 지 92년만에 한줌 유해로 돌아왔다. 그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됐다.<황동일 기자>

◎하와이 한인독립운동 역사적 의의/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한인들 대부분 노동자 불구 임정에 50만∼60만달러 지원/독립운동가 19명 포상계기 미주지역 중심잡힌 평가기대

하와이를 비롯, 멕시코 쿠바 등지의 미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해방전까지도 그 수가 1만명을 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시기 미주지역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구분해보면 크게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지원활동과 대미 선전외교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지원은 3·1운동 직후부터 활발히 전개되는데 1919년 대한인국민회의 지출결산을 보면 총지출액 8만4,000여달러 가운데 37%인 3만600달러가 임시정부에 송금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만한 금액은 당시 막 성립된 초기 임시정부의 유지와 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미주 한인들의 임시정부 재정지원활동은 해방전까지 약 50만∼60만달러가 됐다. 이러한 재정지원에 대해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미주지역의 한인들은 거의 다 노동자였지만 애국심이 매우 강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번 52주년 광복절을 기념하여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125명의 독립유공포상자 가운데 박종수 조병요 김호 백일규 최진하 선생 등 미주지역에서 활동한 19명이 포상받게 된 것은 당연히 매우 뜻깊은 일이다.

이들 대부분이 백범일지에 나타난 임시정부 재정지원자들로서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 공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와이 한인들이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위해 재정지원한 사실에 대해 해방후 김구 선생을 비롯, 독립운동가 조소앙 조완구 등은 『우리가 지금 국내에서 상봉하게 된 영광은 실로 하와이 한인들이 도와준 인연이 크다』고 치하할 정도였는데 이제야 그 공적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하와이 독립운동하면 이승만 계열밖에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이었던 이 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이 이제야 무게중심을 찾게됐다는 점에서 이번 포상은 의미가 깊다.

한편 이번에 포상을 받는 유공자 가운데 1930년 미주한인사회에 처음으로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 사회주의를 통한 민족독립운동을 꾀한 변준호 같은 인물은 다른 포상자와 성격을 달리한다. 변준호는 1940년대 조선의용대 후원회와 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결성에 힘쓰는 한편 중국 중칭(중경)의 민족혁명당을 후원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포상은 따라서 사회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활동목적이 분명히 민족의 독립에 있으면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평가를 내리려는 학계 및 우리 사회의 개방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포상에 포함된 미주 한인들은 이 지역의 많은 유공자 가운데 일부만이 선정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주지역에 대한 민족운동사 연구가 매우 미진한 것이 근본적인 이유라 하겠다. 이번 미주한인들의 포상을 계기로 그동안 미진했던 미주지역 민족운동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이 지역 독립운동이 정당한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앞으로 더욱 많은 독립유공포상자가 발굴되기를 기대한다.

▷하와이 한인 독립단체 활동상◁

▲1907년 한인합성협회 창립

▲1909년 국민회 창립

▲1910년 국민회, 한일합병 부인설명서 발표

▲1913년 이승만, 하와이 한인기숙학교 학장으로 취임

▲1914년 국민회, 박용만 주도로 국민군단 창설

▲1919년 국민회,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 파견 <이승만 민태호 정한경>

▲1919년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취임

▲1921년 동지회 창립, 한인단체 분열 시작

▲1921년 이승만, 독립공채 판매

▲1922년 국민회, 하와이대한인교민단으로 개칭

▲1931년 이승만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

▲1932년 국민회 재건, 본격적인 임시정부 지원체계 갖춤

▲1936년 국민회 총본부, LA로 이전

▲1941년 하와이 한인들, 루즈벨트 미 대통령에 항일자금 3만달러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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