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광도)의 평화기념공원에서 원폭의 파괴력에 경악하며 반전, 반핵, 평화, 사랑을 기원하던 사람들은 공원 서쪽 경계를 흐르는 혼가와(본강) 건너편에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보게 될 것이다. 왜 그 비석은 공원 밖에 서있을까.1945년 8월6일 히로시마를 때린 원자탄은 20만명의 목숨을 뺏었다. 그당시 히로시마에는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징용됐거나 이주한 10만여명의 한국인이 있었고, 그중 2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2,000여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무명으로 세월속에 묻혔다.
원폭에서 살아남은 동포들, 특히 노인들은 그들을 잊지 못했다. 조국도 일본도 관심을 갖지 않고, 평화공원 그 어디에도 흔적이 없는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해서 위령비라도 세우자고 노인들은 호소했다. 60년대 말 장태희(85·민단 고문)씨 등 몇명이 위령비 건립에 나섰다.
처음에 노인들은 한반도를 바라보며 강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적당한 돌을 찾자고 말했다. 그러나 이왕이면 조국의 돌로 비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왔고, 돌을 구하러 경주에 가서 왕릉들을 본후에는 그 비석을 본떠서 만들자는 주장이 추가됐다. 그래서 위령비는 머리에 용을 새기게 됐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애초에 공원안에 부지를 주기로 약속했던 히로시마 시장은 평화공원 시설운영협의회가 『공원안에 제3자가 공작물을 세울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부지 제공을 거부했다. 그는 공원 밖에 30평을 주겠다고 말했다. 『비석이 완성된 마당에 승산없는 싸움을 계속할수는 없었다. 우리는 강변에 축대를 쌓아 터를 닦고 비를 세웠다』고 장태희씨는 회고했다. 그 자리는 원폭으로 숨진 이씨 왕가의 이우(당시 일본 육군 중좌)공이 강물에 떠내려 가다가 발견된 장소이기도 하다.
70년 4월10일, 원폭 25년만에 한국인 위령비가 세워졌다. 떠돌던 원혼들은 안식처를 찾았으나, 그 비의 위치가 차츰 문제가 됐다. 반핵운동의 메카가 된 히로시마를 찾은 세계인들은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민족 차별을 의심했고, 해마다 늘어나는 한국인 참배자들은 분노했다. 히로시마시는 지난 90년 공원안에 부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민단과 총련이 합의하는 위령비」라는 조건이 붙었다. 「한국인 위령비」냐 「조선인 위령비」냐에서부터 엇갈리는 남과 북의 논의는 곧 깨졌다. 27년전 어렵게 위령비를 세웠던 유지들은 표제와 비문을 바꿔야 공원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에 반발하고 나섰다. 공은 한일관계에서 남북한 관계로 넘어갔다.
히로시마현 조선인 상공회 이사장을 지낸 조총련의 이실근(68·조선인 피폭자 연락협의회 의장)씨는 그 문제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하고 있다.
『지금 있는 위령비를 무조건 공원안으로 옮겨야 한다. 그것은 총련의 것도 민단의 것도 아니며 어렵던 시절 힘을 모았던 유지들의 것이다. 그 비에 대해서는 나도 불만이 많지만 비를 세울때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묘비를 깎으라고 할수는 없다. 통일이 된후 새 비를 세우고 그 비는 땅에 묻으면 된다. 이것은 내 개인 의견이지만, 총련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히로시마시는 평화공원에 「민족차별」이 있다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인 위령비가 서있는 곳은 이우공을 발견한 장소라는 연고가 있고, 공작물 설치 금지 규정이 정해진 67년 이후 공원안에 세운 다른 위령비는 그 이전에 허가받은 것이고, 공원안에 있는 원폭 사몰자 위령비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인 등의 희생자 이름도 들어가 있고, 한국인 위령비 이전은 전적으로 민단과 조총련의 합의에 달려있다고 마스다 마나부(증전학) 히로시마시 국제평화추진실장은 설명했다.
어떤 설명에도 불구하고 공원안에 들어가지 못한 한국인 위령비는 히로시마의 숙제다. 원폭은 국적을 묻지않고 생명을 뺏어갔으나, 사자들에겐 국적 차별이 있었다는 인상을 피하기 어렵다. 어떤 동포들은 일본의 민족차별을 말해주는 상징물로서 한국인 위령비를 영원히 그자리에 놔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학교 직장 동네별로 일본인들이 공원안에 세운 그 수많은 위령비속에 한국인 위령비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누구나 평화공원에 묻게 되는 자연스런 질문이다.<편집위원·히로시마(광도)에서>편집위원·히로시마(광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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