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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하와이 한인 1세대 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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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하와이 한인 1세대 독립운동사

입력
1997.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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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기다려온 뒤늦은 보훈/낯선 이국 사탕수수농장서 피땀흘려 번 품삵을 쪼개 임시정부에 보낸 애국혼/단지 김구계라는 이유로 광복후에도 조국땅 못밟고 이국서 한맺힌 삶을 마감한 심영신 선생 등 6명에 올 광복절 훈포장이 주어진다/그러나 아직 어둠속에 묻힌 애국자가 상당수 있다는데하와이 이민 1세대의 독립운동사가 올해부터 새로 쓰여진다. 15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릴 제52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지금까지 서훈에서 빠졌던 하와이 이민 1세대 독립운동가 6명이 훈·포장을 받게 된다. 이로써 하와이 이민 1세대의 독립운동사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됐다.

심영신 박신애 박종수 임성우 조병요 이홍기 선생이 바로 그들. 백범계였던 이들은 정부수립 반세기가 지나도록 정부차원의 포상은 커녕 이승만 초대대통령과 반대입장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입국마저 거부당해 독립한 고국땅을 제대로 밟아 보지 못하고 사탕수수밭 언저리에서 망향의 삶을 마친 사람들이다.

대부분 사탕수수농장 인부였던 이들은 당시 하와이 교민사회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 전대통령의 동지회를 외면하고 국민회나 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성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가만히 서있어도 등가죽이 벗겨질 듯한 작렬하는 태양아래 이름도 모를 질병과 노역에 시달리며 피와 땀을 흘린 대가로 이들이 받은 하루 품삯은 69센트. 쪼갤 것도 없는 돈을 쪼개 상하이(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봐야겠다는 일념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이 한푼 두푼 모아 보낸 독립자금은 고단한 피난길에 오른 임정요인들의 주요한 활동자금이었으며 특히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거사자금으로도 사용됐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백범은 「백범일지」에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고마운 마음을 상세히 기록해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훈포장은 커녕 독립조국을 원대로 밟아보지도 못하고 모두 이역땅에서 고인이 되었다.

박신애 여사와 함께 애국부인회에서 독립자금 모금을 담당했던 심영신 여사의 사위 이동진 목사(82·호놀룰루연합감리교회). 『심여사는 광복 직후부터 여러차례 호눌루루 총영사관에 한국 입국비자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거부됐다. 항의를 하면 영사관측에서는 위쪽의 지시로 할 수 없다며 곤혹스러워 했다』고 회상했다. 이목사는 또 『간부가 아닌 일반 회원들도 국민회쪽 사람들이라면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며칠간 영사관에서 농성을 해 독신자 3명을 겨우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1920년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이홍기 선생의 장남 로버트 리씨(72)도 『아버지는 정부수립직후부터 고국방문을 희망했지만 60년대 후반에야 비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1920년대에는 국민회를 통해 임정을 지원하던 이홍기 선생은 1931년 자신이 일하던 카우아이섬 한인들을 규합해 단합회를 조직, 자체적으로 임정에 자금을 지원했다. 호놀룰루에 있는 동지회와 국민회가 법정소송 등 갈등을 빚어 임정을 지원하는 채널이 일시 막혔기 때문이다.

국민회총회장을 지낸 하와이 독립운동의 거두 박종수 임성우 조병요 선생도 이번에야 서훈대상자에 포함됐다. 특히 박종수 임성우 선생은 「무력투쟁」을 주창한 박용만 선생이 미주지역에서의 군사훈련 기반 마련을 위해 1914년 하와이에 설치한 국민군단에 각각 대대장과 참위로 참여해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조병요 선생은 또 임성우 선생과 함께 백범 선생의 요청으로 1931년 중국 등지의 무력항쟁을 직접 후원하는 하와이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 자금 1,000달러를 송금하는 등 1930년대 대일 무력항쟁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조선생의 외손녀로 하와이 주의회 하원부의장을 지낸 재키 양씨(63)는 『할아버지는 성품이 강직한 분이어서 내놓고 말씀은 안했지만 고국 방문이 무산되자 오랫동안 상심속에 지내시다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들의 공적이 그동안 정당한 평가는 고사하고 조명조차 받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하와이대 최영호 교수는 『초대 정부에서는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그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이들의 독립운동을 조명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번에 이들이 훈포장 서훈대상자로 선정된 것도 백범의 차남 김신씨(75·전 교통부장관)가 백범일지에 기록된 이들의 후손을 찾아 일일히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와이대 서대숙 교수는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지회 간부 등 측근들은 고국으로 불러 정부요직에 기용하면서 국민회나 반대파에 대해서는 고국방문을 막고 여러 측면에서 차별을 했다』면서 『이러한 정치상황이 이들에 대한 연구를 어렵게 했고 그 현상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교수는 이어 『정권이나 이념에 편중된 독립운동 연구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며 「학자들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방미중인 김신씨는 『공적이 분명한 분들인데도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아 그분들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역사에 기록된 미주지역 유공자 가운데 이제 70%정도가 정당한 평가를 받은 것 같다』는 김씨의 말에는 아직도 30%의 알려지지 않은 애국자들이 태평양 건너 어둠속에서 역사의 조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하와이 항일군사조직 국민군단/1914년 박용만 선생 창설/한때 훈련생만 300여명/중국 제외 해외 최대규모/그러나 이승만과 갈등 끝/창설 2년만에 문닫아

미국 하와이주. 푸른 바다와 티 없는 하늘. 눈부시게 타오르는 태양과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열대성 소나기가 쏟아지는 하늘 한켠에 살짝 걸린 무지개. 핏빛 땅덩어리 때문에 더 이상 짙어질 수 없는 사탕수수 농장의 검푸른 녹색. 가만히 있어도 코를 간지르는 열대식물의 꽃 향기……. 그렇지만 하와이는 우리에게 천혜의 관광지로보다는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호놀룰루에서 북쪽으로 40㎞가량 떨어진 카할루지역 아후이마누 계곡. 80여년전 박용만 선생이 창설한 「국민군단」에 자원한 이민 1세대들이 조국해방을 위해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다. 그들은 사탕수수농장에서 하루내내 노역에 시달려 지칠대로 지쳤지만 해가 진뒤면 한숨돌릴 겨를도 없이 산을 넘어 몇시간을 달려와 힘든 줄 모르고 밤늦도록 훈련에 몸을 내던졌다. 지금은 고급주택단지로 변해 당시의 흔적은 커녕 기념표지 하나 남아있지않지만 넓은 풀밭 가운데 서면 여기저기서 그들의 함성이 들려와 저절로 숙연해진다.

국민군단은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을 제외하면 해외 항일 군사조직 가운데 최대규모였지만 한동안 그 존재조차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국민개병」과 「무력항일투쟁론」을 내세우며 미국본토에서 군사훈련소를 꾸려가던 박용만이 하와이에 국민군단을 창설한 것은 1914년. 캘리포니아 등지에 소규모의 소년병학교를 열고 있던 그는 국민회 초청으로 1912년 하와이로 이주, 국민회 기관지 신한국보(후에 국민보로 개칭) 주필을 맡았다. 그는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교민들에게 주장했고 결국 박종수 등 국민회 요인들의 후원으로 1,360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부지와 운영자금을 얻고 한인 노동자 103명을 모아 시장에서 구입한 미군복을 입고 미국군제로 훈련에 들어갔다. 하와이대 서대숙 교수는 『당시 하와이와 미국본토, 멕시코 등지에 구한말 군인 출신이 700여명에 이르러 체계적인 군사훈련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록에 따르면 국민군단은 교민사회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훈련생이 311명으로 불어났고 운영경비도 당시로는 작지않은 금액인 7만8,600달러가 모금됐다. 그러나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민군단은 창설 2년만에 갑자기 문을 닫게된다. 여기에는 국민회와 이승만의 갈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이승만이 국민회 총회관 건립과정에서 공금유용 혐의가 있다고 소송을 제기하자 국민회 책임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서대숙 교수는 『이승만은 국민군단이 미국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수백명으로 일본군을 직접 상대하는 것은 자원낭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겪고 있던 미국은 군사훈련을 허락했고 박용만의 원래 계획은 일본과의 직접 대결보다는 중국과 연해주 방면의 독립군에 인재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일로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국민회는 이후 국민군단지원을 중단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직접 지원하게 된다. 국민회 홍순영 회장은 『국민군단을 통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려던 계획이 무산돼자 국민회원들이 방향을 선회해 김구 선생의 임정을 직접 지원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호놀룰루=이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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