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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사람들(다큐멘터리 세종대왕:1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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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사람들(다큐멘터리 세종대왕:1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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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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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업적뒤엔 사심없는 인재등용/능력만 있으면 신분 안가리고 파격발탁/자신의 세자책봉 반대한 황희도 영의정까지 기용/이순지·장영실·노중례·서거정·신숙주·정인지 등 조선 대표하는 천재 키워『그대는 내가 아니었다면 음악을 짓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그대가 아니었다면 역시 음악을 짓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아악을 정리해낸 박연의 공을 칭찬하면서 한 말을 성종실록(98권 9년 11월7일조)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왕은 김종서를 두고도 『내가 있다고 해도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육진개척)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종서가 있다고 해도 내가 없었다면 이 일을 주관하지 못했을 것이다』(「연려실기술」)라고 했다.

그렇다. 세종도 그 찬란한 업적을, 뛰어난 인재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결코 일궈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가문좋고 머리좋고 그래서 정권이 희한한 방법으로 몇 차례나 바뀌어도 평생을 양지에서만 꼬물대는, 저 잘난 「요즘 인재들」과는 대하장강을 사이에 둘 만큼 품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라에 이롭고 국민에게 복을 주는, 사심없는 큰 그릇들이었다.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여진족을 토벌한 최윤덕, 타고난 장수로 천문기기 제작과 화포제조에도 크게 기여한 이천, 문관이면서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가 된 이순지와 김담, 후일 「동문선」을 편찬한 서거정, 훈민정음 창제와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신숙주, 거의 모든 서적편찬에 참여한 정인지, 외교와 국방에 공이 큰 조말생, 조선초 문물제도 확립에 크게 기여한 청백리 맹사성, 15년을 함경도 국경지대에서 근무한 하경복, 「고려사절요」의 초고를 쓴 당대의 문장가 남수문, 관노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자였던 장영실, 동양의학을 집대성한 의원 노중례…. 얼핏 꼽아도 밤하늘 별무더기처럼 수 많은 천재의 이름이 줄을 잇는다. 우연일까? 15세기 전반 세종시대에 조선조 500년을 대표할만한 인걸들이 대거 집결해 있는 것은?

국가의 동량지재를 알아보고 능력에 맞는 일을 맡기고 모함받을 때도 믿고 소임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해준 대왕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지아자에게 불타는 충성과 사명감으로 보답했다.

대왕의 인재등용은 용병술이니 용인술이니 하는 차원이 전혀 아니다. 아랫사람에게 충성경쟁을 하게 만들어 2인자를 눌러 앉히는 식의 저차원은 더구나 아니다. 대왕의 바다같은 도량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황희(1363∼1452)를 영의정으로 발탁한 것이다. 태조 16년. 당시 이조판서 황희는 왕이 세자(양녕대군)를 쫓아내려 하자 극구 반대하다 공조판서로 좌천됐다.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거듭 반대하다 평민으로 강등돼 파주와 남원을 전전하며 유배형을 살아야 했다. 이때 이직도 황희와 뜻을 같이 하다가 유배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태종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인 세종 4년 2월 두 사람을 다시 불러들인다. 주위의 반대가 심했지만 이들이 누구보다 세종을 잘 보필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몇년 뒤 이 직을 영의정(국무총리), 황희를 찬성(종1품)으로 승진시켜 법전편찬을 맡긴다. 선왕이 다시 기용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한 사람에게 중책을 맡긴다는 것은 아무 지도자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왕은 1431년 황희(당시 69세)에게 영의정의 중책을 맡긴다. 그는 이후 세종 31년 87세로 은퇴할 때까지 무려 18년간이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후덕한 인품으로 조정을 원만하게 이끌며 농사법 개량, 천첩 소생의 천민신분 면제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한가지 일화. 대왕은 과학진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운관(지금의 기상청)출신 윤사웅을 전격 남양부사(정3품 지방관)에 임명한다. 지진과 혜성을 관측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다. 파격이었다. 당장 승정원(비서실)에서 『변변치 못한 벼슬아치들에게 하룻만에 특명으로 큰 고을 수령직을 제수하니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빨리 명을 거두소서』하고 반대가 빗발쳤다. 하지만 대왕은 오히려 윤사웅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격려하고 2년마다 겨울에 가죽옷을 새로 만들어주게 했다.

대왕은 특히 일찍부터 두뇌들을 한 데 모아 특별 육성했다. 집현전. 이 기관은 세종 2년 1420년 3월16일에 발족한 조선조 최초·최고의 싱크탱크로 임금에 대한 자문과 학문연구 및 서적편찬, 도서 수집·정리 등으로 세종 시대 문화·과학진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인재들이 수놓은 세종대의 시대정신은 서양말로 하면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적이고 우리 식으로는 실학적이었다. 추진하는 일 하나하나, 기용하는 인물 한명한명이 국가와 백성을 우선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당시의 풍토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신숙주와 성삼문이 사역원(중국 몽골 여진 일본어 등 외국어의 번역·통역교육을 담당하는 기관) 책임자로 임명돼 외교를 맡게 됐다. 중국어 교습 시간을 두고 배우도록 하면서 원 안에서는 우리말로 대화하는 것을 금했다… 옛사람이 실무에 힘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지금은 저들이 어찌 (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나 「박통사」의 한 구절 말이나마 통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세종시대는 15세기 전반 세계사적으로 드문 문화민족국가를 이룩했다.

◎돋보기/집현전/조선 최초·최고 싱크탱크/소신 안맞으면 직언 불사/세종 불당건립 추진하자 10차례 반대상소 올려 37년만에 세조때 폐지

집현전은 조선왕조 최초·최고의 싱크탱크였다. 이곳 출신들은 세종은 물론 성종시대까지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 정립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경복궁 안에 두고 내관들이 식사를 돌보게 하는 등 연구에 불편이 없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대왕은 학사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대견해 했고 어느 때는 새벽녘에 공부하다 잠든 선비에게 자신의 표범가죽옷을 벗어 덮어주기도 했다. 또 술과 고기를 수시로 내리고 시회도 열어주었다.

이토록 총애받는 학사들이었지만 소신에 맞지 않으면 강경한 언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이 말년에 대궐 안에 불당을 지으려 하자 10차례나 반대상소를 올리고 그래도 임금이 거절하자 모두 집으로 가버렸다. 세종은 텅빈 집현전을 보고 눈물 흘렸다(「국역대동야승」 23권).

집현전 출신은 세조가 집권하면서 영원히 길이 엇갈린다. 정인지 신숙주 정창손 등은 영의정에서 병조판서까지 차지한다.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수십명은 반역죄로 처형되거나 자결한다. 집현전은 세조 2년 1456년 6월 발족 37년만에 폐지된다. 세조로서는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세종 어록

『이미 법을 만들었는데 왜 또 왕의 명령을 받고 나서야 감찰하겠다고 하는가? 자주 명을 내리면 명이 가볍게 된다. 경이 알아서 감찰하고,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보고한 뒤 죄를 주라』(세종실록 7권 2년 1월11일조, 대왕은 호조판서 김점이 『창고담당 관리들이 여러해 동안 이미 쓴 물건을 아직껏 문서로 인수인계하지 않았으니 임금의 뜻을 받들어 엄히 감찰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자 이렇게 답했다.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될 일을 여기저기 눈치 보고 상부의 지시만 기다리는 우리 사회의 행태를 질타하는 듯하다).

『「고려사」에 공민왕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이 멋대로 쓰고 깎고 하여 사신의 원래 초고와 같지 않은 곳이 아주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미덥게 전할 수 있겠는가』(실록 2권 원년 12월25일조, 태조때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를 보고 나서 사실과 다르게 쓴 것을 두고 개탄하며 한 말이다. 역사를 얼마나 엄격하게 대하고 기록하게 했는가를 알 수 있다).<이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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