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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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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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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의 인물들을 심판하거나 재판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주체성이 있는 민족이라고 전제할 때 일반 서민을 두고 일일이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민중앞에 지도자로 등장했거나 그들 밑에서 크게 활약했다고 믿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마땅히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민족의 오랜 역사를 다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다만 지나간 100년을 돌이켜 볼 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하는 문제는 그 윤곽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체결이 되도록 적극 활약한 한국측의 대표들은 분명히 민족과 국가에 크게 해로운 짓을 하였다고 믿는다. 예를 들자면 이완용 같은 이는 학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적극 추진했고 1907년 내각총리 대신이 된 후, 그 해 6월에 헤이그밀사사건이 터지자 송병준 등과 더불어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면서 양위를 강요했다.

그는 드디어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기는 못할 짓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공로 때문에 이완용은 일본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와 아울러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자리도 따냈으며 뒤에는 작위가 더 올라가 후작이 되어 영달을 누리는 몸이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우리가 일본총독 밑에 살면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처벌할 기회를 전혀 가지지 못했지만 해방이 되고 그 필요를 절감한 나머지 정부는 이른바 반민특위를 구성하고 민족을 반역한 모든 죄인을 민족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완용 후손의 토지 상속문제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거론되는 까닭은 반민특위가 그 후손에 대한 어떤 처벌도 법으로 만들지 못하고 흩어졌기 때문이다.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내용을 알고보면 전혀 친일파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숨어서 독립운동을 많이 도운 이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애국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남 모르게 아편밀수나 하며 일본 관헌의 앞잡이 노릇을 한 자들도 여럿 있는게 사실이다. 만일 반민특위가 제 구실을 하였다면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자유당이 3·15부정선거로 패망의 길을 갔지만 당시 내무부장관이던 최인규가 교수형에 처해진 것 외에는 그 일에 관련된 많은 범법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가 오늘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지 않은가.

5·16군사쿠데타와 그 뒤를 이은 공화당 정권의 큰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10·26사태가 벌어졌으련만 그런 일들에 대한 책임을 물을만한 정식기구를 우리는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5·16군사쿠데타와 강행된 유신체제가 올바른 평가를 한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난번 여당의 대통령후보경선에서 『제 얼굴이 박정희 대통령을 닮았다고 합니다』라는 한마디로 인기가 급작스레 상승한 후보가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박정희씨의 18년 집권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 무서운 기관이 중앙정보부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죄가 없다는 젊은 학생을 남산 아래 지하실에서 때리며 밟으며 물먹이며 허위자백을 강요하던 당시의 정보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가. 그런 허위자백을 근거로 조서를 작성하고 그 시나리오대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10년, 15년, 20년, 무기 혹은 사형을 구형하고 언도하던 공안부의 검사들과 그런 어거지 재판을 하던 판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대 법대의 최종길 교수를 숨지게 하고 인혁당사건이라는 애매모호한 사건을 허위날조하여 하재완을 비롯하여 7인의 젊은 목숨을 서대문구치소 미루나무 그늘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그 나쁜 놈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가. 지나간 100년을 두고 정의가 정의로 밝혀진 일이 단 한번도 없는 이 역사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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