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유물 국립박물관보다 많아 18만점/정부선 유물만 떠맡긴채 ‘나몰라라’ 뒷짐/‘박물관법’엔 대학관련 규정조차 없어『대학박물관에서 문화재가 썩는다고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도 할 말은 많습니다. 유물을 온전하게 관리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지 않습니까. 박물관은 대학종합평가 항목에서도 빠져 있어요. 예산 순위에서 꼴찌로 밀리는 것이 당연하죠. 시설도 부족하고 학예연구원을 둘 여력이 있을 리 없습니다. 돈이 없어 허덕이는 대학박물관에 무작정 유물을 맡겨 놓고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재는 국가 재산 아닙니까. 국가는 아무 지원도 해주지 않으면서 관리가 형편없다고 비난만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최근 「대학박물관, 문화재 관리 형편없다」 제하의 언론보도에 대한 대학박물관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유물에 대해 1차적 관리책임이 있는 국가는 한푼도 지원해 주지 않는데 왜 관리소홀의 책임은 모두 대학박물관이 져야 하느냐』는 것이 이들의 주장.
국립중앙박물관 등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모두 13만여점. 전국 71개 대학박물관 소장 유물은 18만여점에 달한다. 수적으로 대학박물관에서 관리하는 유물이 훨씬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학박물관 문화재에 대한 정책적 배려는 전무한 실정이다.
「박물관 및 미술관진흥법」에는 대학박물관에 대한 규정이 아예 없다. 지난해에야 대학부설기관을 책임지는 교육부에 박물관 담당이 생겼을 정도다. 그나마 대학국 산하도 아닌 교육정보담당관실에서 기본적인 현황 파악 정도만 하는 수준이어서 적극적인 지원책은 기대하기 어렵다. 대학도 종합평가 항목에 들어 있지도 않는 박물관에 대한 예산 지원이 부담스럽다. 결국 엄청난 양의 문화유산이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썩어가고 있는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한 관계자. 『대학이 마구잡이로 발굴에 나서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유물을 제대로 보존할 만한 시설이나 인력이 없다면 발굴을 해서는 안돼요. 일부 대학에서는 발굴비에 눈이 멀어 비전공자까지 발굴에 나서고 있습니다. 수준 이하의 발굴로 값진 문화재가 손상된다면 얼마나 커다란 손실이겠습니까』
대학박물관의 반론도 만만찮다. 유적 발굴을 책임지는 전담 기관이 대학 외에는 없기 때문에 대학이 나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형국책사업 등으로 발굴 수요가 쏟아지는데 보존시설·인력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수많은 문화재가 방치 혹은 파괴되는 것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는 주장이다.
서울대 이선복 교수(고고미술사학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발굴 건수는 일본의 1%에도 못미쳐요. 오랜 역사와 국토 면적으로 따져볼 때 엄청난 양의 유물이 발굴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워낙 발굴인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대학박물관의 조건이나 자격을 따질 정도로 여유가 없어요. 발굴에 있어 「옥석」을 가릴 단계가 아닙니다』
대학박물관은 오히려 밀려드는 구제발굴 수요 때문에 계획적인 학술 발굴이나 심도깊은 유적조사는 엄두도 못낸다고 불평했다. 숭실대 최병현 교수(고고학)는 『대학이 발굴을 전담하다시피 한 것은 해방 이래 잘못 정립된 국내 고고학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계획적인 학술발굴이나 연구에 전념해야 할 대학이 1년에 6개월 이상 구제발굴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이 오히려 안타깝다』고 말했다.<김경화 기자>김경화>
◎발굴·보존전문가 태부족/전공과정 학부개설대학 한곳뿐/졸업후엔 근무할 직장도 드물어
매년 200여건의 발굴작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2만여점의 문화재. 「원형 그대로」의 유물 보존을 위해서는 발굴에서 보존까지 전문적인 기술을 요구하지만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대부분 발굴주체인 대학에서 사전 조사에서 사후 관리까지 전부 떠맡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재 선진국인 일본은 발굴과 보존이 구분된 전공학과 출신의 전문가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어 이상적인 작업 세분화가 이뤄진다. 문부성 산하 6,120명의 매장문화재 전문조사원이 지표조사, 사전 발굴조사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학박물관은 발굴에 관여하지 않고 5만여명의 발굴전문 기술자와 1,000여명의 보존과학자들이 발굴과 관리를 나누어 맡고 있다.
이런 일본에 비해 우리의 발굴·보존 과정은 너무 초라하다. 사전 전문 조사원이 거의 없는 상태이고 기껏해야 200∼300명의 발굴기술자와 40∼50명의 보존과학자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발굴의 대부분을 현직 대학교수가 관장하고 있어 학기중에는 지속적·계획적인 발굴이 어려운 데다 발굴하더라도 보존 전문가를 갖춘 대학이 한 곳도 없어 응급처치 수준에 그치는 실정이다.
왜 이토록 전문가가 부족할까. 우선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이 없다. 문화재 보존과학 전공 과정을 학부에 두고 있는 대학은 유도대학 후신인 용인대학 뿐이다. 전통과 이름을 자랑한다는 대학은 그저 사학과나 고고미술사학과, 고고인류학과에서 개론수준의 과정만을 두고 있고 그나마 그것도 13개 대학 뿐이다. 전문가 선발 절차도 불분명하다. 발굴기술자나 보존과학자는 물론이고 사립대학 박물관 학예연구원을 선발하는 공인 기준도 마련돼 있지 않다.
이에대해 문화재관리국은 『오는 99년 한국전통예술학교가 설립되면 문화재 전문가 부족현상은 사라지게 된다』며 『이론위주의 대학과 달리 전통예술학교는 현장 실습위주의 교육을 계획하고 있어 이른 시일내에 일본과 비슷한 수준의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국대 박도화 학예연구원은 『전문가 양성 이전에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연구소를 늘리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지적했다. 『아마 현재 문화재 관련학과 학생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전공과 다른 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다녀와서 전문기술자가 된다고 해도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이 없다. 정부에서 박물관을 선진국수준으로 대폭 늘리고 발굴기술자와 보존과학자를 두도록 의무화해 우선 일자리를 만들어 주면 전문가는 자연히 양성될 것이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서화류보존처리 전문가 박지선씨/“입김만 닿아도 부서지는 종이를 되살립니다”
『신라시대의 닥종이는 보존성이 탁월한 고급지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싸구려 닥종이 뿐이어서 고급지는 모두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어요』
국내를 통털어 세손가락도 꼽기 힘든 서화류 보존처리 전문가의 한 사람인 박지선씨(36·용인대 전임강사). 고서화 보존처리 과정에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이 닥종이 뜨는 기술의 퇴보다.
질 좋은 국산 닥을 일본에 수출하고 싸구려 동남아 닥을 수입해 쓰는가 하면 과거의 훌륭했던 도침(종이나 피륙의 다듬이질) 기술도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적인 방법대로 닥을 잿물에 삶으면 빛깔이 누래 따로 표백처리를 해야 하는 등 손이 많이 갑니다. 요즘은 그게 귀찮아 양잿물에 삶는데 빛깔은 희지만 섬유질이 약해져 보존성이 떨어질 수 밖에요』
그가 종이질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단에 그린 그림이라도 배접지는 반드시 종이를 사용하는 만큼 좋은 종이는 서화류 보존처리의 기본이다. 그나마 한 재벌이 자체 연구실과 전통기술자를 두고 「돈 안되는」 좋은 종이 만들기에 나선 것이 커다란 위안이다. 95년 8월 화엄사 5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다라니경 보존처리 과정에서 박씨는 1년반 동안 한솔제지 연구팀과 공동작업을 했다. 기대를 걸어도 좋을 만하다는 게 그의 평가이다.
그는 박물관이나 연구소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용인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인사동의 작업실겸 거실에서 두명의 직원을 두고 박물관과 일반인들의 의뢰를 받는다. 종이로 만든 유물이 발견되면 우선 뒤엉킨 종이를 낱장으로 떼어낸다. 입김만 닿아도 날아가 버릴 정도여서 여간 조심스런 작업이 아니다. 낱장별로 좀먹거나 떨어져 나간 부분을 조사해 손상지도를 만들고 X선, 적외선 사진 등으로 섬유질과 본래의 모습을 더듬는다. 같은 종류의 종이를 만들거나 구해 짜깁기를 하듯 손상부분을 메우는 것으로 보존처리는 끝난다.
그는 세계 정상의 동양 서화류 보존처리 기술을 확보한 일본 교토(경도)국립박물관 문화재 보존수리소에서 8년동안 땀흘려 이런 기술을 익혔다. 서울미대에서 대학원까지 동양화를 전공하고도 붓을 놓았지만 후회보다는 보람이 크다. 『좋은 그림과 글을 실물로 대하면서 그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그것이 제 일의 가장 큰 보람입니다. 밥먹고 그림 그리는 것만 생각했던 옛사람들의 그림 솜씨를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손상된 부분을 비워두는 것도 오리지널을 따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황영식 기자>황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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