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김포공항서 봉영식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서거한 독립운동가 부부 정양필 이화숙 선생 등 순국선열 5위의 유해가 5일 하오 국내로 봉환됐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하오 4시30분 김포공항 2청사에서 박상범 국가보훈처장 권쾌복 광복회장 유족 친지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외순국선열 5위 봉영식을 갖고 서울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임시안치했다. 국내봉환유해는 6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해외안장 독립유공자 유해 170위 가운데 소재가 확인된 100위중 56위가 국내로 봉환됐다.
▲홍언 선생(1880∼1951)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가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 주필 등을 맡아 언론을 통해 국권회복과 한인동포의 애국사상 고취 및 문맹퇴치에 힘썼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종익(96년 봉환) 선생 등 8명과 함께 흥사단을 창립했으며 망국의 울분을 표현한 시 100여편을 남겼다. 선생은 광복이 됐으나 귀국자금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고 유족도 없이 미국에서 서거했으며 송종익 선생의 유언으로 아들 송위리씨가 국내봉환을 주선했다.
▲정양필 선생(1893∼1975)
1905년 유일한 박용만 선생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4월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비밀회의를 갖고 국민대표 25명과 함께 한성임시정부를 발족시키면서 동정부 평정관에 선임됐다.
▲이화숙 선생(1892∼1979)
1919년 중국 상하이(상해)에서 임시정부 후원단체인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선출됐으며 같은해 10월 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임시정부 재정지원활동을 벌였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정양필 선생과 만나 결혼했다.
▲차원몽 선생(1900∼1939)
평북 선천에서 3·1독립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5년 남다른 용맹성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 정의부 부사령관으로 선임됐으며 한·중연합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남인상 선생(1868∼1951)
1905년 을사조약후 만주로 망명, 창동사숙 중학부를 설립해 항일교육과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지역 조선민족대표 17명중 한 명으로 「조선독립선언선고문」을 발표했다. 광복후에는 기독교대표로 옌볜(연변) 제1차 임시참의원을 지냈다.<송용회 기자>송용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