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현장에 젊음을 던져라”/어릴때 꿈 유엔근무 분쟁지역서 실현/‘죽음 곁의 생활’ 불구 임무수행에 보람/10여년 기자경험 바탕 소말리아 첫 전국지 발행/진취적인 안목 갖고 지역·국제사회 기여를젊은이들이 점차 나약해지고 이기적이 되어 간다는 지적이 많다. 93년 우리나라 최초의 유엔평화유지활동(PKO) 전문요원으로 내전지역에 파견돼 4년여간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아온 송혜란(42)씨는 일신의 안락과 출세에 안주하려는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교훈을 준다. 고운 눈빛과 자그마한 체격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살아온 그는 젊은이들에게 『밖으로 눈을 돌려 보다 진취적으로 삶의 현장에 뛰어들라』고 충고한다. 2주간의 휴가를 맞아 우리나라를 찾은 그에게서 남다른 삶의 얘기를 들어본다.
□대담=김경희 차장
―오랜만에 서울에 오신 것 같은데 소감은.
『지난달 23일 2주간 체류예정으로 왔습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서울은 참 무섭게 발전합니다. 그러나 너무 풍요로워서 오히려 생동감이 없습니다』
―PKO 전문요원은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유엔의 특수임무(Mission)를 수행하는 것 입니다. 유엔본부의 정규 사무직원하고는 다릅니다.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 투입돼 정세를 분석하거나 인권상황을 감시하고 경제재건 등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을 합니다. 한국여성은 저 하나뿐이지만 외국인 여성은 꽤 있고 전직외교관이나 의사 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습니다』
―여성으로서는 무척 험한 일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일을 하시게 됐습니까.
『청소년시절부터 유엔근무를 꿈꿔왔어요. 그래서 한국에서도 외교전문잡지기자로 경험을 쌓았고, 미국에 가서도 국제문제를 공부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학비를 벌기 위해 식당 웨이트리스 등 여러가지 일을 했는데 이것이 극한상황에서 견디는 훈련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10여년간 기자생활을 하며 문제발굴과 해결 능력을 키운 것이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근무지가 위험한 곳인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첫 파견지인 소말리아는 격렬한 내전상황이었지요. 시가전이 벌어지면 헬기로 출퇴근하기도 했어요.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차를 몰더라도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습니다. 침실과 화장실이 딸린 컨테이너가 숙소로 배당됐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보면 변기에 총탄이 박혀있곤 했어요. 두번째 근무지인 보스니아에서는 지뢰를 처리하기 위한 포크를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할 만큼 위험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보다는 현지인과의 신뢰구축이 더욱 힘든 일이었습니다. 40도가 넘는 술을 즐겨 마시는 보스니아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저도 술꾼이 다됐습니다』
―소말리아에서는 그곳 최초의 전국지를 발간하셨다지요.
『유엔은 내전을 종결짓는 일 못지않게 주민의 의식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제가 기자경력이 있다고 해서 유엔신문인 「만타(오늘)」를 발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8절지 2면규모의 초미니신문이었지만 현지어로 5만부, 영어로 5,000부를 찍는 그곳 최초의 전국지였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여성 경제 생활문제를 주로 다뤘습니다.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하던 여성문제를 다루니까 여성들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여성기자를 구할 수 없어서 비교적 개방적인 전통무희를 기자로 특채한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현재 영국국영방송인 BBC 현지통신원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전상태에서 신문을 발간하자면 어려움도 많았을텐데요.
『수시로 총격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직원들이 팔다리에 총상을 입고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한번은 신문배달을 나갔던 직원 7명이 몰살 당하는 일도 겪었어요. 그런가 하면 기자가 한동안 보이지 않아 수소문해 보면 일가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이 바로 곁에 있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사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는 것이에요』
―문화가 다른데서 오는 문제도 적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소말리아에 있을때 그런 것을 많이 느꼈지요. 한 예로 회교국가인 그 곳에서는 대부분의 여성이 영아때 할례를 받습니다. 성에 눈을 뜨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유아사망률이 높을 뿐아니라 결혼 후에까지도 여성들이 큰 고통을 받아요.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루었지요. 엄청난 항의와 협박을 받았습니다. 또 한번은 회교 기념일에 마호메트 관련 기사를 다루었다가 혼쭐난 일도 있습니다. 신성한 마호메트의 경전을 감히 영어로 인용했다며 신성모독이라고 펄펄 뛰었어요』
―보스니아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종족과 종교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평화정착이 쉽지 않다고 하는데….
『아직 내전이 한창이던 95년 7월 첫 부임때는 정세분석을 담당했습니다. 그후 크로아티아담당관으로 옮겨 피난민 귀환작업과 인권감시역을 맡았지요. 요즘에는 주로 이산가족 재상봉과 성묘행사 등을 주선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보스니아에서는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 회교계가 유고연방 해체이후 치열하게 대립해왔습니다. 비록 내전은 종식됐지만 가슴속의 응어리는 쉽게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전쟁이 한창일 때보다는 모든 것이 황폐화한 전쟁후가 더 어렵습니다』
―「이산가족 재상봉행사」 등은 우리의 「이산가족찾기」에서 착안하신 것 같은데….
『그곳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많습니다. 이산가족 재상봉행사는 보통 강을 경계로 이뤄지는데 부모형제나 연인을 기다리는 이들은 반대편 강안에 배가 뜨는 것만 봐도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됐는데도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면 감시하던 유엔군 병사들도 눈물을 쏟습니다. 타향의 공동묘지에 묻힌 가족 친지의 묘를 둘러보는 성묘행사도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묘지에도 예외없이 지뢰가 널려 있어서 저지선을 쳐놓곤 하는데 자식을 보러온 부모들이 결사적으로 묘지에 뛰어들기 때문에 늘 긴장을 해야 했습니다.』
―누구보다 도전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살아오셨다고 생각됩니다.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안목을 넓히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 좀 더 크게는 국제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교수 의사 변호사 등 이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나 사회단체가 나서서 젊은이들이 열린 마음으로 진취적인 일을 하도록 주선해야 합니다. 일례로 다양한 비정부기구(NGO)를 조직, 유엔등 국제단체와 연계시켜 경험의 폭도 넓히고 국제감각도 체득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세계화의 참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NGO활동을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등 적극 장려합니다. 세계에 진출한 기업들이 이들의 후원을 맡는다면 두루 도움이 되겠지요』
―신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훈련」과 「긴장」입니다. 항상 훈련해야 하며 또 늘 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에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6일 보스니아로 돌아가 올 12월까지 그 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보스니아 미션이 끝나면 캄보디아 등 아시아지역을 자원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국제적인 활동을 원하는 젊은이들이나 사회단체를 유엔과 연결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약력
▲55년 서울생 ▲75년 이화여고 졸 ▲77년 연세대 2년 수료 ▲77∼81년 외교전문 월간지 「디플로머시」 편집기자 ▲79∼81년 로스앤젤레스 커뮤니티 칼리지 서울분교 「한국어와 문화」 강사 ▲81년 도미, 뉴욕주립대 사회학과 편입 ▲85년 컬럼비아대 국제문제대학원(SIPA)에서 「국제기관과 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 취득 ▲84∼93년 뉴욕한국일보 기자 ▲93년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전문요원으로 소말리아 파견 ▲95년∼현재 보스니아 파견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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