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선일여’ 차승의 체취 물씬/차와 선의 경계는 무엇인지 다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고간 고승/타락한 고려불교 혁신하려다 홀연 입적한 여강언덕바위엔 대다인의 향기가 곳곳에경기 여주 신륵사. 동대에 오르면 유명한 7층 벽돌탑이 우뚝 서 있고 남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 지류 여강이 시원스럽다. 7층 벽돌탑 아래 강변 절벽끝의 팔각정자 강월헌 왼쪽에 강을 내려다 보며 서있는 3층석탑 하나.
바로 이 자리가 고려말 인도와 중국의 조사선맥을 이은 나옹(1320∼1376)스님의 다비가 행해진 곳이다. 나옹스님은 차와 선, 다삼매 선삼매, 다선일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간 차승이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같이 물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스님의 불교가사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수많은 불자들이 즐겨 외우던 것으로 최근에는 가락까지 붙은 노래로 애창되고 있다. 차와 선의 경계가 무엇인지, 차인들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지금까지 수많았던 차승들 가운데 나옹스님만큼 우뚝한 차인은 찾기 어렵다.
인도 108대 조사인 중국의 지공선사로부터 한잔의 차로 법을 전해 받았다. 또 임제종 종통을 이어 일문을 이루고 있던 평산선사로부터도 인가를 받았으니 인도와 중국의 선맥을 한몸에 이은 셈이다.
「스승님 차를 받들어 마시고/ 일어나서 세번 예배하나니/ 다만 이 참다운 소식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네」(봉끽사다료 기례인례삼 지저진소식 종고지우금). 스승인 지공선사로부터 법을 받고 올린 게송이다.
「한잔 차를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다시 한잔 시원한 차를 사람들에게 보일때/ 아는 사람은 오지만 만일 모르면/ 한없이 보이고 보이어 새롭고 또 새롭네」 이렇게 언제나 차 한잔으로 법을 얘기했다. 스님의 차생활은 도였다. 법도와 이치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밥먹고 목마르면 차마시는 일」이 바로 법이라 했다.
어느 날 세 사람의 수행자가 와서 예배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한가지 지혜가 있을 것이니 지혜가 이르지 못해도 한 귀절을 말해 보시오』 첫째 중은 말이 없었다. 스님은 『말에 지혜가 있지는 않소. 둘째 스님은 어떤가?』 그 중도 말이 없었다. 『셋째 칠통(깨치지 못한 사람)은 어떤가?』 그러나 그 중도 또한 말이 없었다. 『이 노승이 스님네들에게 감파(심중을 꿰뚫어 봄) 당했소. 앉아서 차나 드시오』
중국에서 20여년간의 도행이 알려져 1355년 원나라 황제의 간청으로 연도 광제선사의 주지가 된다. 이듬해 개당 법회때 황제는 금란가사와 상아불자를 내렸다. 해동 3국에서 나옹스님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됐다. 나옹은 이 모든 것을 챙겨 귀국한다. 공민왕이 1371년 그를 왕사로 봉하고 조계종사의 자격으로 송광사에 주석케 한다.
그러나 스승인 지공선사가 입적하고 정골사리 및 가사를 전해 받은 나옹은 경기 양주 회암사로 돌아온다. 회암사터가 인도의 나란다사와 비슷하니 그에 걸맞는 대가람을 건립하고 싶다던 스승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공민왕 21년(1372년)부터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킨다. 우왕 2년(1376년)에 260여칸 규모의 사원이 지어졌다. 그해 4월 초파일의 낙성회를 전후해 서울과 지방의 선비와 아낙들이 밤낮으로 절을 찾아 생업이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비방으로 스님은 경남 밀양 영원사에 주석하라는 왕명을 받게 된다. 회암사를 떠나 한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제자들이 살고 있는 신륵사에서 발길을 멈추고 5월15일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가 바위 언덕에 앉아 홀연히 세연을 끊어 버렸다.
나옹스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불교가 더 이상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음을 통감하고 있었다. 인도와 중국의 새로운 선맥을 이어 와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려 했으나 인연이 닿지 못했다.
스님의 치적중의 하나는 한문의 음만을 빈 우리말 가사로 경전에 서툰 대중들에게 불교의 이치를 쉽게 전한 것. 「서왕가」, 「낙도가」, 「승원가」는 지금도 그보다 더 쉽게 쓸 수 없는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문자의 필요성에 대한 이런 태도가 뒷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로 이어지고 가사문학을 꽃피게 한 기틀이었다는 게 간송미술관연구실장 최완수씨의 생각이다.
나옹스님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와 반송이 뜰앞에 서있는 조사당(보물 180호)과 나옹스님의 영정, 조사당 뒤 언덕위의 사리탑과 탑비인 보제존자사리석종비…. 신륵사는 지금도 대차인 나옹스님의 체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김대성 편집위원>김대성>
◎알기쉬운 차입문/향기로 마시는 중국차 차냄새만 맡기위한 문향잔을 따로 사용
흔히 중국차는 향기로 마시고, 일본차는 빛깔로, 그리고 우리 차는 맛으로 마신다고 한다. 이는 차를 만드는 방법에 따라 차의 특성이 달라진 결과이다. 중국차를 향기로 마신다는 것은 차를 발효시켜 만들기 때문에 발효된 향을 즐기는데서 비롯한 말이다. 일본차를 빛깔로 마신다는 것은 차를 쪄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차를 맛으로 마신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가 마치 여느 나라에서 나는 차보다 좋다는 막연한 주장에 불과한 것처럼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초의스님은 우리나라 차에는 맛으로 유명한 중국 육안차의 맛과 약으로 이름난 몽산차의 효능이 있다고 설파했다. 즉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가 세계의 명차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말이다. 이에 뒤따르는 우리들의 과학적인 검증을 거칠 때 초의 스님의 주장은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중국차는 향기로 마신다는 것은 불과 80년대 초반만 하여도 찻잔을 하나만 쓰던 중국인들이 요즘 들어 비교적 제대로 갖춘 찻자리일 경우 한사람이 두개의 찻잔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나는 차를 마시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향기를 맡기 위한 문향배이다. 향기를 맡지 않고 향기를 듣는다고 표현한 그들의 시적 상상력은 차생활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들은 먼저 문향배에 차를 따른 다음 다시 찻잔에 따른다. 그리고는 마치 그윽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눈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문향배에 남은 냄새를 맡은 다음 찻잔의 차를 마신다. 아기 주먹한한 작은 차관에서 차를 우려내 소주잔보다 작은 찻잔에 차를 마시는 중국인들에게 왜 그렇게 작은 잔으로 차를 마시느냐고 물으면 「향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향배를 쓰는 이유를 덧붙인다. 그냥 마시면 뜨겁기 때문이라는 것. 오룡차나 철관음처럼 발효된 중국차는 90도 이상의 물로 뜨겁게 우려내서 마신다.
문향배는 그런 차생활속에서 나온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뜨거운 찻잔을 운반하기 위해 찻잔 받침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차생활은 바로 생활의 지혜와 함께 한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박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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