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불개입 입장보다 부작용 최소화할 적극적 중재자 역할 다해야 한다금년 1월 이후 대기업 그룹의 잇단 부도위기에 대응하는 정부의 입장은 한국적 기업운영 풍토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기회에 무리한 세확장이나 과도한 차입과 같은 파행적 기업경영, 관치금융 및 정경유착 등 오랜 고질을 근절하는 관행이 정착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큰 기대를 실현하기에는 정부의 입장이 너무 단순하고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는 개별 기업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관련 당사자들(기업과 금융기관들) 사이의 해결에 맡긴다는 원칙만을 되풀이 하고 있다. 고작 부도유예협약을 주선한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문제가 대부분 과거 정부의 과도한 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고 믿는다.
물론 어느 순간에 악순환의 고리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되고 결국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정부의 시각은 옳다. 단지 정부의 확고한 불개입원칙이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측면에서 좀더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하나는 「불개입」이 지향하는 중장기적 정책방향이며 또 다른 하나는 「불개입」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문제다. 정부의 의무는 국민경제가 지향하는 비전을 경제주체에 제시하고 또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게 하는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대기업 그룹의 부도위기에 전혀 간여하지 않는다는 「중립선언」이 가져오는 파급효과의 하나는 전반적인 기업구조조정의 촉진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게임규칙을 내용으로 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마땅히 마련되어야 한다. 기업정책 차원에서는 각종 제약(진입 및 퇴출은 물론 합병, 분할, 자산매각 등에 대한)의 완화에서부터 재벌정책, 경쟁정책 및 산업정책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기업구조조정은 경쟁력 강화 및 전문화를 취지로 하는 산업구조조정으로 연결되며 새로운 국제분업질서에 대비하기 위한 과제이기도 하다.
한편 한국경제가 국내외적으로 당면한 여러 어려움이 최근 대기업의 부도위기에 크게 기인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방경제의 위축, 신용질서의 혼란, 금융시장 경색, 중소기업 도산 및 실업증가 등은 심각한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시장의 불안정에 더하여 국내 금융기관 및 기업들의 해외신인도 하락은 이중으로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단·중기적 문제점들은 당연히 예견되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일시에 불개입을 선언하는데 그쳐서는 안되며 그 파장을 예상하여 적절한 보완책을 마련함으로써 정책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때로는 국제규범(예로 세계무역기구(WTO)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규정하고 있는)이 제약요인 같이 보이지만 국내 경제곤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결코 지장을 가져오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부도위기의 와중에서 가장 혼선을 빚는 경우가 기아사태라고 생각한다. 기아사건이 주는 정책적 시사의 하나는 기업지배체제의 확립이 시급히 요청된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는 현실적으로는 경영진에 거의 전적으로 그 책임이 있다고 느껴지지만 주거래 금융기관들의 감독, 관리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또 소유·경영 분리가 가져온 실패작이라는 논리의 비약도 설득력이 없다.
이번 사태의 해결이 기아그룹과 채권은행단 사이의 타협에 맡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구태여 크라이슬러의 사례를 원용하지 않더라도 정부는 이 기업의 정상화를 위하여 적극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미 오래전에 경제력 집중 억제, 업종 전문화 및 소유·경영 분리 등에 국민적 공감대가 모아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미 지적했듯이 국가경제가 지향하는 방향을 다시 확인하고 적절한 유인책을 모색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끝으로 단순한 시장논리가 가져오는 폐해를 시정하는데도 정부의 역할이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비록 정권 말기라는 한계가 있으나 정부는 소신을 갖고 예측가능한 범위내에서 경제를 운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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