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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하(다큐멘터리 세종대왕: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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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하(다큐멘터리 세종대왕:13)

입력
1997.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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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쓰이게” 반포전 반복시험/절묘한 운율 ‘용비어천가’/최초 정음 문학작품 탄생/불교세계 한글로 형상화/‘월인천강지곡’ 손수 지어 한자음 정리·언해사업 등 ‘일상생활 쉽게 사용’ 심혈성삼문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삶을 마치는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사내 알기를 우습게 안 기생 황진이는 한번 같이 놀아보자는 뜻을 천연덕스럽게도 이렇게 읊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 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우리 말이 아니면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성삼문의 지조와 황진이의 미모를 그려볼 때면 『훈민정음이 없었던들 이런 문학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을까. 소월, 지용, 미당…의 아름다운 시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새 글자를 널리 쓰이게 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대왕은 훈민정음 공식반포 전부터 실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그 쓰임을 시험하고 또 시험했다. 우선 우찬성 권제, 우참찬 정인지, 공조참판 안지 등에게 「용비어천가」를 짓도록 했다.

세종 27년 1445년 음력 4월5일. 125장으로 된 영웅서사시 「용이 하늘로 올라간 노래」가 완성됐다. 『해동육룡이 날아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이 동부하시니(1장)/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새 꽃 좋고 여름 하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 아니 그칠새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2장)…』 이 시는 조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운 당위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화하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태조와 태종은 물론 이성계의 4대조 할아버지까지를 천명을 받은 여섯 용으로 상징하고 이들의 무공과 문덕을 「초를 듬뿍듬뿍 쳐가면서」 묘사했다.

22, 23장에는 이성계의 할아버지 도조가 검은 용과 흰 용이 싸우자 검은 용을 활로 쏘아죽였다든가 화살 하나로 까치 두마리를 떨어뜨렸다든가 하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온다. 회안군 방간이 정안군 방원(후일 태종)에게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켰을 때 방원의 말이 화살에 맞고 집 마구간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정안군 부인 민씨(후일 민경왕후)가 따라 죽으려 한 이야기를 109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말이 살을 맞아 마구간에 들어오거늘 성종을 뫼셔 구천에 가려 하시니』

훈민정음은 이처럼 건국과정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서부터 쓰여졌다. 그리고 「용비어천가」는 이제 오늘을 사는 모든이에게 우리 말의 깊이와 고어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운율의 절묘함과 웅혼장대하면서도 비장한 전개는 서사시의 본령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왕은 또 훈민정음으로 손수 문학작품을 짓기까지 한다. 세종 28년 1446년 음력 3월. 아내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났다. 친정아버지가 상왕 태종에게 사약을 받고 어머니가 노비로 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했을 때도 내색 한 번 않고 지아비와 시부모를 지성으로 받든 아내였다. 그만큼 슬픔은 컸다. 대왕은 우선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후일 세조)에게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을 편찬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참고로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짓는다. 부처의 자애로운 가르침은 달이 천이나 되는 강물에 두루 비치듯 시공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미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은 당시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홀한 불교적 정신세계를 우리 말로 형상화한 최초의 불교문학으로 꼽힌다.

허웅 한글학회 회장은 『월인천강지곡은 한자를 적는데 있어서도 한글표기를 앞에 놓고 그 뒤에 작게 한자를 붙여 놓았다』며 『이러한 표기법은 한자마저 한글로 적으려는 대왕의 혁신적인 글자 정책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세종은 이와 함께 당시 한자음이 혼란하여 공부와 일상생활에 불편이 큰 점을 고려해 한자음의 정리에 나섰다. 세종 29년 1447년 9월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완성된 「동국정운」이 그것이다. 이어 한문으로 된 책을 우리 말글로 옮기는 언해사업에 착수한다. 이 당시의 언해사업 결과는 당시에는 출간되지 못하고 후일 숙종 때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문물제도를 정리한 「증보문헌비고」는 세종의 언해사업에 대해 『유신에게 명하시어 따로 관청을 마련하고 경전을 우리 소리로 풀어내는 작업을 맡도록 했다. 구절을 띄어 읽기에 편하게 했다』고 적고 있다.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한달만인 세종 28년 1446년 10월에는 피의자의 죄상을 적는 기록을 한글로 하도록 했고 서리를 뽑는 특별채용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한글을 널리 사용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돋보기/훈민정음의 원류/전서·범자 모방설/몽골 파스파문자 기원설/발음기관 상형설까지 명확한 답은 못얻어

세종의 한글창제를 이야기할 때 여러가지 설이 엇갈리는 부분이 ㄱ, ㄴ, ㄷ, ㄹ, ㅅ, ㅇ과 같은 글자꼴을 어떻게 만들어냈는가 하는 문제다.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해례 서문은 『글자는 고전을 모방했다』고 하여 중국 고대의 전서에서 따왔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성현(1439∼1504년)은 「용재총화」에서 『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라 했고 이수광(1563∼1628년)도 「지봉유설」에서 『우리 나라 언문은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했다.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글자 기원설이다. 이능화 역시 「조선불교통사」(1932년)에서 한글의 글자법이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며 범자와 한글의 꼴과 소리가 비슷한 것 몇가지를 들어보였다.

반면 이익(1681∼1763년)은 「성호사설」에서 『원나라 세조 때 파스파(팔사파)가 몽고의 글자를 만들었는데… 언문을 처음 지을 때 성삼문이 가서 물은 명나라 학사 황찬이 전한 것은 아마도 이 것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하여 몽고의 옛 표음문자인 파스파문자 기원설을 주장했다. 이밖에도 티베트문자 기원설, 고대 인도의 속어인 팔리어문자 기원설, 발음기관 상형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세종 어록

『우리나라 사람의 행태는 더디고 느려서 맡은 직책을 유유히 세월만 보내면서 질책이나 면하려 하고, 간혹 그 직책을 다하고자 하는 자가 있어도 빨리 끝내려고 조급해 하기 때문에 도리어 사단을 일으키는 폐단이 있다. 느리고 빠름이 알맞지 못하면 일 처리가 제대로 안된다』(세종실록 99권 25년 2월1일조,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복지부동과 한탕주의를 동시에 경계하는 말이다).

『나귀란 것을 중국에서는 많이 쓰고 있으니, 요동같은 데서 가져다 교역해 기르면 어떨까?』(실록 46권 11년 12월9일, 대왕은 이처럼 외국문물을 들여와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류큐(유구)국의 날렵한 배를 들여온 것도 그렇고 중국에서 각종 실용서적이나 기기를 들여온 것도 그렇다. 요즘 말로 하면 세계화에 다름 아니다).<이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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