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크라시」란 말이 있다. TV와 데모크라시(민주주의)의 합성어로 TV정치를 일컫는다.사실 오늘의 우리 정치도 어느새 텔레크라시 시대로 성큼 들어섰다. 정치의 대명사격인 각종 선거가 TV토론 없이는 이뤄질 수 없을 정도로 TV정치가 바야흐로 꽃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3일간 열대야속에서 진행된 여야 3당 대통령후보초청 TV토론회가 끝나자 마자 비판의 도마위에 올라있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성찰케 한다. 고비용 저효율의 구태정치와 선거를 극복할 대안으로 등장한 TV정치란게 과연 만능의 도깨비방망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준비를 어느 정도로 철저히 해야 최소한의 대안 노릇이라도 가능케 될 것인가.
최근 학계나 언론계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TV토론에 대한 불만의 핵심은 겉핥기성의 나열식 솜방망이 질문에 기자회견식의 모범답안 나열만으로는 대통령후보의 자질검증은 물론 정책토론자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전문 「코디」를 동원한 분장에다 스튜디오 예습까지 거친 후보들의 모습은 본래의 나이를 쉽게 잊게 할 정도로 왜곡된 영상이미지를 전달하는 마술마저 부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같은 영상의 마술을 우리는 이미 생활주변에서 여러 번 실감한 바 있었다. 소위 미인대회 때마다 등장하는 포토제닉상이란게 언제나 대상수상과는 상관없는 후보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고, TV화면에서 본 기막힌 미색도 실제로 봤을 때는 얼마나 황당하고 초라했던가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TV토론붐을 선도한 신한국당 대선후보경선결과 키나 몸집이나 얼굴이 작은 후보들이 실제로 체구가 듬직한 후보들을 제치고 1, 2위를 차지한 것도 포토제닉이 지닌 함정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이색풀이도 있다. 이러다간 명대통령의 대명사로 불리는 링컨조차도 비쩍 마른 큰 키에 수염이 텁수룩한 칙칙한 모습때문에 요즘 대선후보로 나섰다간 낙선하기 알맞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겉보기를 떠나서도 후보자질이나 정책검증 및 예리한 차별화 등의 실제적 기능에서 TV토론이 마냥 무력, 「소문난 잔치」로 그쳤다는 한 후보의 지적도 경청할만 하다. 여당후보경선에서 시종일관 정책제시와 대의원 설득으로 일관했던 그 후보는 오늘과 같은 겉핥기식 토론방식으로는 결코 세불리기 패거리정치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어 대의원 혁명의 불을 지필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었다.
여기에서 지금과 같은 TV토론의 함정과 한계가 차츰 분명해진다. 우리의 역사성과 현실상황에 걸맞은 국가지도자로서의 대통령상에 대한 개념정립이나 자질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도 없이 급조된 패널선정과 경황없는 준비만으로 TV앞에서 한 후보만을 놓고 선문답을 나눠봤자 그게 어떻게 진정한 토론이 될 수 있겠는가. 지난 60년 케네디와 닉슨 후보끼리의 그 유명한 대결이 TV토론의 효시였음을 상기한다면 후보끼리의 토론이 빠져버린 TV토론이란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결국 미국처럼 후보가 동시에 출연, 진지한 토론과 정책대결의 장이 마련될 수 있을 때 TV토론도 비로소 그 부여받은 역할에 차츰 접근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 TV토론 뒤 방송과 언론사에 빗발친 짜증스런 국민들의 불만중에는 「질문하러 나왔나 잘 보이러 나왔나」 등 패널들에 대한 신랄한 힐책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후보자끼리의 토론과 함께 토론회주관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텔레크라시 선진국인 미국의 경우 토론회주관자가 전미 라디오·텔레비전 위원회에서 미 여성유권자 연맹으로 바뀌었고 지난 87년부터는 대통령토론위원회(CPD)가 만들어져 13개 민간단체와 연계해 TV토론의 공정성과 효율성 제고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밖에도 통합선거법의 규정을 고쳐 후보자끼리의 토론을 명문화하고 선거운동기간이전의 토론회개최 등도 가능케 해야 한다.
이처럼 텔레크라시는 그냥 이뤄지는 게 아니다. 진지하고 철저한 준비로 TV토론의 함정과 포토제닉시대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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