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2월9일 토요일 스산한 저녁, 예술가들이 즐겨찾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한 재즈바.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나는 한잔 술에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뛰어들어와 방금 나온 뉴욕 타임즈 매거진을 들어보이며 흥분하고 있었다. 친숙한 한 흑인청년의 전면 컬러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 잡지의 표지인물로 나온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이며 그 권위는 상상을 초월한다.장 미셸 바스키아. 1960년 뉴욕 출생. 어제까지만 해도 가난과 무명의 20대 중반 흑인청년. 바로 그가 작품을 배경으로 앉아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스키아의 전시회가 17일까지 서울 현대화랑(02―734―6111)에서 열리고 있다. 참 반가운 일이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던 흑인청년이 어떻게 좌절과 비웃음을 딛고 세계화단에 남을 작가로 성장했는가 하는 의문은 작품을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80년대 뉴욕은 세계 최대의 낙서문화(?) 도시였다. 뉴욕시의 가장 큰 골칫거리 낙서가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낙서작가를 배출했다. 그 대표작가로 바스키아의 동료인 키스 헤링(1958―90)이 있다. 바스키아는 신문, TV 등 어디에서건 이미지를 선별해 흡수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스포츠 스타, 재즈연주자, 할리우드 스타, 경찰, 아메리칸 인디언, 해골만 남은 사람 등 이런 이미지들을 그는 아이티쪽 혈통에서 이어받은 원초적인 영매의 직감력으로 접근했고 캔버스 위에 거친 붓질과 서로 부대끼는 색깔로 표현했다. 이 거친 충돌과 분노에 가까운 열정은 그가 현실을 겪으며 걸러낸 영웅적 초월성의 결과였다. 바스키아의 이러한 에너지와 초월성은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미술과 물질문화를 강렬하게 대변한다.
88년 8월12일 미친 듯이 작품을 토해내던 그는 이스트 빌리지 스튜디오에서 27년의 생애를 마감한다. 그날 뉴욕에서는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개봉을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고, 나는 인파 속을 걷고 있었다. 전세계에 산재해 있던 작품을 엄선한 대규모 전시회가 92년 10월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렸다. 장례식에서 동료 예술가 수잔은 에이 알 팽크가 쓴 「바스키아를 위한 헌시」를 낭독했다. 『바스키아는 불꽃처럼 살았다. 그는 진정으로 밝게 타올랐다. 그리고 불은 꺼졌다. 하지만 남은 불씨는 아직도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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