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비를 넘고 나면 또 어지러워 지고, 겨우 앞으로 갔다 싶으면 또 다른 사태가 벌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곤 하는 것이 오랜 세월 우리 사회가 거듭해 온 악순환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사를 불신하고, 냉소적이고,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유보하는 속성을 지니게 됐다.이회창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의 두 아들이 어떻게 병역면제를 받았는가라는 의혹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들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그 의혹에 대처하는 이회창 후보의 태도, 고건 총리의 국회 답변 내용, 총리를 교체하라는 여권의 압력, 거기다가 신한국당 서청원 의원의 돈봉투 분실 사건까지 겹친 오늘의 상황은 새로운 기분으로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려던 국민에게 찬물을 끼얹고 있다.
「법대로, 원칙대로」라는 강직한 이미지를 재산 삼아 대통령 후보가 된 이회창씨는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의혹이 당연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부정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불법이냐 합법이냐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어떻게 한 집안의 두 아들이 모두 체중미달로 병역면제를 받을 수 있었는가, 과거나 현재나 그들의 체중은 「미달상태」가 아니고, 신체검사 당시 갑자기 체중이 내려가야 했던 납득할만한 병력도 없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라는 것인가.
키가 179㎝인 그의 장남은 91년 2월 체중 45㎏으로, 키 165㎝인 차남은 90년 1월 체중 41㎏으로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는데, 그들의 체중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상한 수치다. 면제 판정에 법적인 하자가 없었으니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라면 우리는 그의 「법대로, 원칙대로」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3일 국회에서 고건 총리가 했던 답변도 어이가 없다. 그는 병역면제 의혹에 대한 야당의원의 질문에 대해서 『그것은 정당내부의 문제이고 사적인 문제이므로 내각의 총리가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나의 견해를 밝힐 의무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 그것은 정당내부의 문제가 아니고, 사적인 문제는 더욱 아니며, 총리로서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국민의 국토방위 의무에 관한 문제다. 그의 측근은 『총리가 자세하게 답변할 경우 오히려 의혹을 부각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왜 총리가 국민의 궁금증보다 정치적인 배려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그는 총리라는 자신의 직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총리의 답변에 대한 이회창 후보 진영의 반응, 여당 일부에서 제기했다는 총리 교체 주장은 더욱 한심하다. 그들은 총리가 병무청 자료를 인용하여 적극적으로 의혹을 해명하지 않고, 「사적인 문제」라는 미묘한 표현을 썼다는 것에 반발하고 있으며, 총리의 출신지역을 언급하면서 공정한 대선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대통령 후보중에 전라도 출신이 있으니 전라도 출신 총리에게 선거관리를 맡기는 것이 곤란하다는 그들의 논리는 아무리 다급해도 여당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경상도나 충청도나 다른 지역 출신에게는 한번도 적용한 일이 없는 논리를 왜 전라도 출신에게만 문제삼겠다는 것인가.
이 와중에서 터져나온 서청원 의원의 돈봉투 분실사건은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한다. 그는 10만원권 수표 100장이 들어있는 봉투를 여의도의 호텔방에 두고 나온 후 분실신고조차 하지 않았는데, 정치권에는 으레 돈이 돌아다닌다지만 불쾌한 사건이다. 그들은 『신한국당 전당대회 일주일전쯤 경선비용에 보태려고 지구당 총무부장으로부터 전달받았던 지구당 후원비』라고 해명했으나, 말 그대로라 해도 설득력이 없다. 1,000만원이 들어있던 그 봉투는 깨끗한 경선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슬로건을 비웃고 있다.
이번 대선을 냉소주의 속에서 치를 수는 없다. 아무리 가치관이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해도 공적인 인물들은 공적인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이회창 후보는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의혹을 방어하려고 할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그의 「법대로」는 「179㎝에 45㎏」이란 말과 함께 냉소를 부추기는 새로운 유행어가 되고 있다. 냉소주의의 파괴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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