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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문화재정책/이선복 서울대 교수·고고미술사(전문가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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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문화재정책/이선복 서울대 교수·고고미술사(전문가 진단)

입력
1997.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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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속철도 통과·경마장 건설/관리소홀로 문화재 4,500점 도난 등/희극적인 문민 ‘문화국가 건설’현 정부가 들어선 후 지난 4년여의 시기는 적어도 문화재와 관련해서는 과거 그 어느때보다도 더한 격동의 시간이었다. 그러한 격동의 단초는 정권의 정통성 과시를 위한 가시적 사업으로 국립박물관이 들어선 구총독부건물을 대책없이 부수기로 한 결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에 대한 반대의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부는 지난 대통령선거의 공약임을 내세우며 경주에 경마장을 건설하겠다는 참으로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사업을 공식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문화체육부 내에 체육부는 있지만 문화부는 없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이 두가지만해도 웬만한 선진국에서는 정권의 진퇴가 논의될 법한 일이었지만 사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즉 고속철도 경주통과문제를 둘러싼 찬반론과 역사위치 선정을 둘러싼 2년여에 걸친 뜨거운 논란은 정부의 문화정책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지난 5년간 당국의 관리소홀로 문화재 4,500여점이 도난당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문화재정책이 얼마나 왜곡되고 허술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관리와 관계된 정책다운 정책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특별히 이 부문의 종사자 내지 관계공무원들이 다른 부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못났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정치인들이 앞장 서 지역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한, 역사와 문화의 물증으로서의 문화재를 가꾸는 일은 험난한 가시밭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꼭 5년전 필자는 정기국회 문공위에 출석해 필자가 전공하고 있는 관련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사태와 근본적인 개선책에 대해 네시간 가까이 증언한 적이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의원들이 심각해 하던 그날의 분위기로는 모든 일이 당장 좋아질 듯 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법조문 한자 그들이 나서서 고치지 않았다.

아무리 양식있는 공무원이 애를 쓰건, 혹은 문화재의 보존을 학계가 아무리 목소리 높이 외치건, 다수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제도의 미비는 문화국가 건설을 한낱 꿈으로만 만들 뿐이다. 심지어 발굴중인 유적을 백주에 중장비로 밀어버리는 사람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며 또 그러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규의 강화는 소위 「국가경쟁력 강화」의 명분 앞에 무력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니 정부 일각에서 문화재조사가 경부고속철도건설사업을 지연시키는 중요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하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 나라의 문화재정책, 나아가 문화정책이란 결코 그 자체가 다른 부문의 정책과 아무 상관없는 별개의 독립부문일 수 없다. 문화정책다운 문화정책은 어느 부문의 정책과도 마찬가지로 나라를 책임진 이들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역사관을 지닌 유능한 통치기술자일 때에만 제시될 수 있다. 그것은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적절히 분배하고 무엇을 시급히 개선하고 또 새로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력있는 정치적 안목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문화계 일각에서마저도 박정희시대에 대한 향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 시대에는 최소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상대적으로 보다 일관되고 뚜렷한 목표와 수단을 갖고 문화재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문화를 정치의 화초기생 정도로 다루며 정책다운 정책을 뿌리내리지 못한 사이에 우리 주변에서는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계속 자취를 감추고 있다. 아니할 말로 오염된 공기나 물은 언젠가는 되살릴 수 있지만, 훼손된 문화재는 어찌할 수 없는 법이다.

흔히 듣는 표현에 「세계 일등국가」 운운하는 말이 있지만 자신의 삶의 궤적을 지워버린 이들이 우등생이 될 수는 없다. 굳이 「일등국가」를 말하지 않더라도 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문화국가를 만들기 위한 식견과 안목은 정권을 맡겠다는 사람이라면 꼭 갖추어야할 덕목이다. 굳이 나서서 법을 고치고 제도를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건 다음 정권만큼은 더 이상의 우를 저지르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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