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젊은 미술평론가의 7년간에 걸친 끈길진 노력이 결실을 보아 「Asian Tradition, Modern Expressionism 1945∼1970」(아시아의 전통과 추상표현주의)이란 기획전이 미국 지멀리(Zimmeli)미술관에서 열렸다.러트거즈 뉴저지주립대학이 주관한 이 전시회는 추상표현주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45년 후반기부터 70년까지 미국서 활동한 동양계 작가들이 추상표현주의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다룬 전시회로현지에서도 「뉴욕 타임스」 「뉴욕」 등 많은 유력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본인도 초청을 받아 개막식에 참가하여 30여년만에 휘트니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옛작품들을 다시 보게 되니 마치 잃었던 자식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짜릿함을 느꼈다. 또 30년전에 함께 활동한 오카다 겐조, 노구치 이사무, 기시 등 일본계 작가들 그리고 제임스, 리옹, 윈잉 등 중국계 작가들의 작품을 한 곳에서 대하게 된 감회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귀중한 것은 바쁜 일정을 쪼개서 찾은 몇몇 전시회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4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걸쳐 세계화단을 이끈 것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였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소위 추상표현주의의 선두주자는 역시 윌렘 드 쿠닝이었다. 때마침 드 쿠닝의 80년대 작품을 한데 모은 회고전이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리고 있었고 이 전시기간중에 작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전시장은 연일 대성황을 이루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난 10여년간 드 쿠닝이 우리 주변에서도 요즘 자주 화제가 되는 치매증, 즉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매우 착잡한 심정으로 전시장을 찾았던 것이다.
80년 작품을 시작으로 연대별로 87년까지의 대작들이 MOMA의 한층을 가득 메운 전시장을 약 2시간에 걸쳐 보면서 떠오르는 여러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내가 처음 드 쿠닝을 만난 것은 61년 봄이었다. 드 쿠닝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샌프란시스코 볼스(Bolles)화랑에서 열린 나의 개인전에 찾아온 그는 내가 한국작가임을 알고는 『지금도 한국에는 눈이 많이 오느냐』고 하면서 강원도 전선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후 나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뉴욕에서 그를 만났다. 특히 뉴욕 시내의 「시더 바」란 술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 술집은 추상표현주의 선두주자들의 집합장소로 명성이 높았다. 매일 하오 5시 이후에 그 술집에 들르면 틀림없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낡고 지저분한 바 안에는 죽기전의 잭슨 폴락, 로즈코, 클라인, 필립 거스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드 쿠닝 부부가 자리잡고 있었고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와 시인 후랭크 오하라의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40대의 드 쿠닝은 머리는 백발이었으나 크지않은 키에 농부같은 단단한 체구를 지녔고 직선적인 성격이라 취객들과 주먹싸움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여러모로 현대미술사에 영원히 남을 드 쿠닝 생전의 마지막 전시회가 된 이번 회고전에 대해서 저명한 평론가 로버트 스톤은 특히 그의 80년대 후반기 작품들에 대해 그의 본래의 강점인 큐비즘의 원점으로 돌아간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솔직한 느낌은 85년 이후의 「무제」란 제목의 일련의 작품에서는 그가 40년 가까이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던 시절의 왕성한 생명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나친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의 작품에서는 작가 자신의 의사와 관계가 없는 듯한 기계적인 동작에서 나오는 무기력함이 짙게 풍기는 것 같았다.
전시장을 나와 찬 바람이 몰아치는 맨해튼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미국 화단을 지배하고 있는 화상들의 치열한 상혼과 그 가운데서도 작가들이 자아정신을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보성중고 이사장>보성중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