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학자조차도 “언문 불가” 상소/‘백성의 글’ 필요성 절감후 극비리 문자원리·음운학 연구/성삼문 13차례나 중국 보내 최만리 등 지식인 반대 심하자 “이두는 옳고 이것은 잘못인가” 반박세종 28년 1446년 음력 9월. 세상이 온통 단풍으로 물들고 있을 무렵, 우리 민족 최대의 문화유산인 훈민정음(한글)이 반포되었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을 요즘 말로 옮기면 이렇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 말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지한 백성이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표현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세종)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배워 매일매일 편히 쓰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 해에 50줄에 들어선 대왕으로서는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많았다. 아내 소헌왕후 심씨가 병세가 심해져 3월 52세로 수양대군(후일 세조) 집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얼마 전에는 5남 광평대군이 자식을 남겨둔채 세상을 떴고 보름여만에는 7남 평원대군이 꽃다운 아내를 남기고 세상을 버렸다. 대왕의 병세도 날로 심해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대왕은 마침내 한글을 완성해낸 것이다.
대왕이 언제부터 우리 말을 우리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우리 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법령을 공표하거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을 펴내도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삼강행실도」에 그림을 곁들여 보았지만 모든 책과 법령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뜻대로 효과적인 정치를 펼 수도 없었다.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었다. 새 글자가 필요했다. 그 글자는 아주 간단해서 생업에 바쁜 백성들도 누구든 쉽게 배울 수 있고 뜻을 전하는 데 조금도 불편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
세종의 한글 창제작업은 아주 은밀히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섣불리 이를 알렸다가는 당장에 벌떼같이 들고 일어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먼저 글자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알아야 했다. 남 몰래 국내외의 문자와 음운학에 관한 서적을 두루 구해 읽고 대군들을 불러 앉혀 놓고 글자마다 소리를 내보도록 하는 등 연구를 거듭했다. 나중에는 집현전 학사 성삼문(후일 사육신의 한 사람)과 신숙주를 중국에 보내 음운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요동 땅을 드나든 것이 성삼문만 무려 13차례였다.
훈민정음 창제는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그리고 훈민정음 서문은 바로 그 혁명을 알리는 선언문이었다. 훈민정음이 어지간히 만들어진 세종 26년 1444년 2월20일 하나의 「문화전쟁」이 벌어진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집단으로 훈민정음 반대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 상소는 15세기 전반 당대 거의 모든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요지는 「한글 따위를 새로 만드는 것은 전혀 쓸 데 없는 짓이며 한자와 한문을 버림으로써 우리의 모범이 되는 큰나라 중국을 떠받드는(사대) 정신에 위배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지성으로 사대하여 오직 중국의 제도문물을 중심으로 같은 글자를 써왔습니다. 이러한 때에 지금 따로 언문(반대하는 쪽에서 한글을 약간 낮추어 부른 말)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와 같이 되는 것은 문명에 큰 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라 설총의 이두는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다 중국에서 쓰는 글자를 빌려 말의 표현을 도왔으므로, 원래부터 서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원래 한자를 모르던 먼 옛날과 같다면 우선 언문을 빌려서라도 임시로 쓸 수 있겠지만, 그래도 바른 말 할 사람은 시간을 두고 한자를 익혀 장구한 계획을 세우느니만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함은 예부터 내려오는 폐단입니다. 지금 이 언문은 신기한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만들어 놓은 운서(음운학 서적)에 되지 않은 언문을 붙이고 이것을 강력하게 세상에 널리 시행하려 하시니 후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하나도 이롭지 않은데 왜 굳이 힘을 들이고 애써 연구하십니까?』(세종실록 103권)
대왕은 이렇게 답했다. 『정음(한글)의 음의 원리와 글자의 구성이 다 설총의 이두와 판이하고 음도 다르지 않은가. 또 이두를 만든 본 뜻도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설총의 이두는 옳다고 하면서 지금 임금이 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고 하니 어찌 된 일인가? 그대들이 운서를 아는가. 사성·칠음의 자모가 몇개나 되는 줄 아는가. 상소문에서 신기한 재주라고 했는데 내가 나이가 들면서 책으로 날을 보낼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만을 좋아하겠는가. 그대들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오늘 우리는 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 있을 자랑스런 유산을 갖게 된 것이다.
◎돋보기/훈민정음과 대군들/진양·안평대군이 소리내면 세종은 입모양 관찰 글자 연구/주변선 공부시키는줄로 알아
세종 23년 1441년 음력 1월10일.
대왕(당시 45세)은 밤 늦게 진양대군(후일 수양대군·세조)과 안평대군 두 아들을 불러 들였다.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는 임금 군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이 글자를 소리내 보아라』 진양이 입을 오무리고 힘주어 소리를 냈다. 『군!』 대왕은 유심히 아들의 입 모양을 살폈다. 안평에게도 똑같이 해보라고 했다. 이어 어찌 나자를 쓰고 또 발음해 보라고 했다. 진양이 이번에는 입을 한껏 벌리고 혀를 바짝 끌어당겨 소리를 냈다. 『나…!』.
주변에서는 임금이 대군들을 데리고 공부를 시키는 줄 알았다. 세종실록도 이런 모습을 두고 『(세종은) 날마다 세차례씩 세자와 함께 식사하는데 식사를 마친 뒤에는 대군들에게 책상 앞에서 강론하게 하고 진양대군에게 공부를 가르친다』고 적고 있다.
대왕은 이때 사실 대군들과 함께 은밀히 음성학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자 하나 하나를 발음하게 하고 입 모양을 관찰, 새로 만들 글자의 모양을 다듬어 나갔다. 신하들은 대왕의 이런 숨은 노력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3년후인 1444년 2월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훈민정음으로 음운학 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맡기면서 세자와 진양·안평대군에게 이 일을 관장시켰다.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 참여한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대왕의 뜻과 한글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어록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재능은 있는 법이다』(세종실록 104권 26년 5월20일조, 사람을 능력에 따라 필요한 곳에 가려 쓰는 대왕의 인사 철학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머리와 팔다리 같아 반드시 서로 도와야 한다. 내가 틀린 일이 있으면 대신이 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내가 무엇을 꺼려 따르지 않겠는가?』(실록 114권 28년 10월 5일조, 세종은 큰 귀에 열린 마음으로 아랫사람들의 조언을 가려 들을 줄 알았다. 남의 상사가 된 사람이라면 한번쯤 자신이 『듣는다, 듣겠다』하면서도 기실은 꽉 막혀 있는 것은 아닌지 새겨볼 일이다).<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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