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의 당내 경선이 끝남으로써 올 연말 대통령선거의 3당 후보가 정렬했다. 앞으로 야당후보 단일화가 될는지, 어떤 다른 세력이나 무소속의 출마자가 등장할는지는 모르지만 국민들로서는 큰 선택지가 결정된 셈이다. 앞으로 너댓달 동안 온 나라는 대통령선거 바람으로 들뜨겠고 온 국민들은 심심할 겨를이 없겠다.선거는 선택이다. 그러나 선거가 선택의 게임이라 하여 그것이 무슨 오락이나 심심풀이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데 선거의 심각한 표정이 있고 엄숙한 정신이 있다.
선택은 책임이다. 실존주의라면 난삽하게 들리지만 알고 보면 선택과 책임의 철학이다. 고독과 불안과 고뇌속의 비합리적 인간은 항상 자기를 선택해 자기를 만들어 가는 존재요 자기 자신의 존재방식에 책임을 진다. 인간은 각자 역사적 상황속에서 자유로운 선택으로 자기 책임하에 자기를 실현한다는 생각이 이 철학의 요지다. 이 사상을 정치에 대입하면 선거의 이념이 된다.
선거는 사실 민주주의의 영광이자 환멸이다. 선거의 결과는 민주주의의 성과일 때도 있고 낙과일 때도 있다. 『민중의 일반투표에 의해 위대한 인물을 뽑을 수 있다면 그 이전에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있을 것이다』라고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야유한 것은 독재자의 자기 변호라 치더라도, 키케로가 『민중만큼 불안정한 것이 없고 민의만큼 애매한 것이 없고 선거인의 총의만큼 거짓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고대 로마에서만의 진언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제도는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기 운명을 스스로 정한다는 환상만 줄 뿐, 실제로 유권자들은 투표소에 가는 것으로 정치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그들이 선택한 후보자에게 전가시켜 버리고 자신은 일상 생활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선거의 맹점은 또 반드시 입후보자 중에서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입후보자들이 자격이나 능력이 있건 없건 곱건 밉건 그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국민은 강요당한다. 1968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때 노벨 생물학상 수상자인 조지 월드는 『험프리와 닉슨 중에서는 고를 사람이 없다. 그러나 투표를 하면 고르는 것이 된다. 우리에게 선거는 없고 있는 것은 의식뿐이다』라고 한탄했다. 이러한 제한적 선택이 투표자의 책임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지금까지 과연 국민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투표를 해왔는가에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다가오는 선거에서도 꼭 고를 사람이 있는 후보자들이 나섰는가에 회의를 가진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는 이른바 문민대통령 이전까지는 사실상 정답을 미리 준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당선자의 당선은 거의 기정 사실이었다. 92년 대선때 비로소 비교적 평등한 선거가 치러졌다. 국민들은 정답을 모르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은 국민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정답이었다.
그러나 그 정답은 오답이었다. 그 선거결과를 지금 후회하지 않는 국민은 별로 없다. 처음이다시피 한 민주적 자유의사의 선택이 실패했다. 그 실패는 당선된 대통령의 책임이기 전에 국민의 책임이다. 우리 대통령 선거사의 큰 좌절이요 낙담이기도 하다.
선거가 불완전한 일면이 있다하여 그렇다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포기할 수 없고 국민들은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지는 못한다. 지난번 대통령선거가 선택은 책임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면 이번 대통령 선거는 결코 무책임한 투표여서는 안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는 「라케시스의 제비」 이야기가 나온다. 여신 라케시스는 사자의 영혼들을 불러모아 놓고 제비를 뽑게 해 차례를 정한 뒤 여러가지 인생의 유형들을 늘어놓으면서 각자가 새로 살고 싶은 인생을 제비의 차례대로 고르게 한다. 그 유형 가운데는 참주의 생애도 있고 그것도 한평생 계속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추방이나 거지꼴로 끝나는 것도 있다. 첫번째 제비를 뽑은 영혼은 가장 큰 참주의 일생을 택한다. 그러나 그 참주의 운명속에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등 갖가지 재앙이 숨어있다는 것을 나중에 안 영혼은 가슴을 치며 자기선택을 후회한다. 이때 여신을 곁에서 보좌하던 예언자는 말한다. 『책임은 택하는 자에게 있다. 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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