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박정희가 있었고, 중국에 덩샤오핑(등소평)이 있었듯이, 천형의 땅 캄보디아에는 훈센이 있다. 51년 4월4일생이니 올해 만 46세가 조금 넘은 젊은 지도자다.이달 초 프놈펜 군사정변으로 캄보디아 국민은 50여년간의 내전을 청산하고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줄 강력한 지도자를 얻었으나, 그가 경제번영과 인권이 함께 보장되는 민주사회를 건설할 인물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프놈펜에 주재하는 외교관이나 상사직원들이 전하는 얘기를 모아 보면 그는 상반된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세 딸과 세 아들의 아버지다. 딸 하나는 양녀고, 한 아들은 미국 웨스트포인트의 사관생도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프놈펜으로 상경해 불교사원 승려들에게서 기초교육을 받았다.
군대생활을 시작한 것은 19세 때였다. 시아누크의 독립의용군 모집에 응한 것이다. 시아누크의 친공정권이 친미 론놀군의 쿠데타로 축출되자 그는 당시에는 이름이 별로 없던 크메르루주 게릴라에 합류해 맹활약을 벌였다. 영민한 게릴라 지도자로서의 명성은 그때부터 밖에 알려졌다.
월남전 종전과 더불어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에 붉은 깃발을 꽂기까지 론놀군 상대의 무수한 전투에서 그는 다섯번이나 부상했고, 수류탄 파편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 지금 그의 왼쪽 눈은 의안이다.
그 크메르루주와 결별한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를 정화해 이상향을 만들어 낸다는 슬로건 아래 자행되는 무차별 학살을 그는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베트남 침공과 함께 조국에 돌아온 그에게 외무장관의 중책이 맡겨졌다. 타협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28세 때다. 6년 뒤에는 총리에 올라 캄보디아인민당(CPP)정권의 당·정·군 3권을 장악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부패 무능한 라나리드 왕가 제거에 목표를 둔 훈센의 쿠데타는 박정희의 5·16처럼 「구국의 결단」인지 모른다. 외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냉전의 유산이 또 하나 청산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프랑스 식민통치 이후 계속된 전란과 학살과 굶주림으로부터의 대탈출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다.
외교관들은 그가 실제보다 손해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나이에 비해 어리게 보이는 외모와 외눈박이 의안의 꺼림칙한 인상 탓이다. 그러나 그는 유능한 행정가, 탁월한 전략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기자들과 말할 때 자기를 3인칭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훈센은 군인이 아니다. 그러나 훈센이 군사력을 사용할 때 그건 장난이 아니다』라는 식이다.
자기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주의에 몰입하지 않는 현실적 인간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를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아닌 「실용주의자(Pragmatist)」라고 말한다. 분류하자면 덩샤오핑처럼 실용적 민족주의자인 셈이다. 작년 베이징(북경)을 방문했을 때 장쩌민(강택민)은 그를 캄보디아의 최고실권자로 대우했다고 전한다.
외교관들은 그가 매력적이지만 섬뜩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실용주의자는 때로 윤리적 가치를 무시하기 쉽다. 국민을 도탄에서 구하고 조국을 번영하는 강국으로 재건하겠다는 애국적 정열이 현실적 명분을 얻을 때, 그는 박정희나 덩샤오핑처럼 잔혹한 강권탄압을 주저없이 선택할지 모른다.
지금 캄보디아의 딜레마는 안정된 삶과 민주주의를 함께 가질 수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이 훈센에게 군사정변의 책임을 계속 추궁한다면 캄보디아 국민은 과거의 불안하고 가난한 삶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에는 고도성장이 없다. 고통스럽지만 치를 것은 다 치러야 한다.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이 끝나면서 한 고비를 넘긴 우리 정치도 아직 갈 길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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