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미동속에 삶이 있다”/시냇물 한줄기·바람 한자락 자연에서 길어올린 시/쉬운 소재·쉬운 언어로 맑은 감동을 선사하고 세상살이를 돌아보게 하는데…작은 강줄기에 밤새 눈발이 내린다. 지리산 서쪽 자락에 있는 한 시골 고등학교 교사인 시인은 눈 내리는 강을 보며 스스로 강줄기가 된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36)씨의 다섯번째 시집 「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 발행)의 서시격 작품 「겨울 강가에서」의 전문이다.
복잡해지는 세상살이만큼 어려워지는 시, 그 시들을 읽기에 또 힘이 들어야 하는 요즘 그는 보기 드물게 쉬운 언어로 독자를 시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는 풀이나 길가의 돌멩이 같은 사소한 것에서도 시를 만들어낸다. 지난해에는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로 맑은 감동을 주었던 안씨는 이번 시집에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의 말처럼 『팔목에 힘을 빼고, 목소리를 낮추고,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발 닿은 대로 걸어』 시를 걸러냈다.
「송사리떼에게 거슬러 오르는 일을 가르치려고/ 시냇물은 스스로 저의 폭을 좁히고/ 자갈을 깔아 여울을 만들었네/ 송사리 송사리들 귀를 밝게 하려고/ 여울목에 세찬 물소리도 걸어놓았네」(「여울가에서」 부분).
「바람이 부는 까닭은/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미루나무 이파리 수천, 수만 장이/ 제 몸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먼저 흔들 줄 알아야 한다고」(「바람이 부는 까닭」 전문).
시냇물 한줄기 바람 한자락, 자연의 작은 움직임에서 세상살이를 되돌아보게 하는 미덕을 그의 시는 깨우쳐준다. 그러나 언제나 사물이 인간의 반성을 위한 계기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잠자리가 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곳까지가/ 잠자리의/ 우주다/ 잠자리가 바지랑대 끝에 앉아 조는 동안은/ 잠자리 한 마리가/ 우주다」(「우주」 전문).
81년 등단한 안씨는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 복직 후 전북 장수의 산서고교에서 『흙구덩이에다 호박씨 서너 개씩 묻어놓고 몇날 며칠 싹이 돋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3년여 근무하던 그는 지난 2월 사직했다. 오직 시와 씨름하기 위해서다. 그가 본 자연 중에는 80년대를 흑백사진처럼 각인시키는 것도 있다. 「억새밭은/ 대규모 집회현장 같다/ 80년대가 벌써/ 흑백사진이라니!」(「억새밭에서」 전문).
이번 여름에는 그의 시 「섬」을 읽으며 휴가를 떠나도 좋을듯.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려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 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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