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경쟁은 실망스러웠지만, 후보 선출은 산뜻하게 끝났다. 여당 사상 최초의 자유경선이 큰 파란없이 치러지는 것을 보면서 숱한 좌절속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계속 성장해 왔다는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몇사람이 지배하는 정치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만큼 여론의 힘이 커졌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 신한국당 대의원들의 조용한 혁명이 전체 유권자들의 각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이번 경선을 더욱 산뜻하게 한 것은 대의원들이 중진 정치인들을 제치고 정치 신인들의 손을 들어줬다는 사실이다. 득표율 60%로 후보에 선출된 이회창씨는 김영삼 정부 출범후 감사원장 국무총리 당대표 등을 지냈으나 모두 몇달의 단임이었고, 득표율 40%로 2위를 한 이인제씨는 2선 국회의원에 노동부장관을 지내고 경기도 지사에 당선됐지만, 다른 경쟁자들에 비하면 약관의 신인이다.
지난 한두달 사이 갑자기 치솟은 이인제씨에 대한 인기를 「이인제 신드롬」(증후군)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것 처럼 이회창 후보에 대한 인기도 아직은 하나의 증후군, 또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인제 바람이 워낙 두드러져서 「이회창 현상」이 가려졌을뿐, 두사람이 단기간에 획득한 높은 인기는 지리멸렬하고 원칙없는 정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된 일련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인제 증후군의 중요한 배경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라면, 이회창 현상은 김영삼 대통령의 실정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대쪽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민권변호사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는 이인제씨가 박정희씨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덕을 보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박정희식의 강력한 「생산적 통치」를 원하는 민심이 젊은 우상을 만들어 낼 만큼 오늘의 정치가 비생산적이라는 불신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한 명망있는 법조인이었던 이회창씨가 대중적인 관심과 기대를 모으게 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그를 감사원장으로 발탁하면서부터였다. 그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로 재직했던 기간은 1년2개월밖에 안되는데, 그 짧은 기간에 그는 「원칙대로, 법대로」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헌법에 보장된 국무총리의 권한을 주장하다가 94년 4월 전격 해임된 후 그의 인기는 대통령을 위협할 만큼 치솟았고, 그 인기가 오늘 그를 대통령 후보로 만든 결정적인 재산이다.
단지 1년2개월 동안 소신을 굽히지 않고 법대로, 원칙대로 일했다는 사실이 그처럼 국민을 감동시킨 것은 그동안 국민이 그런 공직자를 얼마나 갈망했는가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신한국당 대의원들 역시 법대로, 원칙대로 일하는 대통령을 한번 보고 싶다는 갈망에서 그를 후보로 선출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그를 당대표로 임명했었다는 사실 자체가 후보 경쟁에서 큰 프리미엄이었다고 하겠지만, 대의원들의 높은 지지는 「대쪽 이미지」에 거는 간절한 소망의 반영이다. 그러나 그가 그 소망을 현실정치에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은 검증이 불충분한 별개의 문제다.
신한국당 대의원들이 한 정치신인에게 건 꿈과 희망은 야당들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두 야당의 대통령 후보들은 이 나라의 정치를 발전시키기도 하고 후퇴시키기도 했던 오랜 직업 정치인들이다. 두 사람이 걸어온 정치적 역정과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다르지만, 그들은 지역감정을 담보로 정치를 해왔다는 비판을 받아왔고, 「구시대 정치인」의 대명사인 「3김」의 장본인들이다. 두사람은 후보단일화의 결단으로 변화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이번 대선의 의미는 보다 분명하게 정리돼야 한다. 한국정치의 병폐는 일당 장기집권에서 오는 것이니 기필코 정권 교체를 이루자는 주장, 세대교체로 구시대 정치를 청산하자는 주장으로 여야가 분명하게 대결하여 한국정치의 오랜 숙원을 하나라도 풀 수 있어야 한다. 5·16이후 계속 집권해 온 경상도 출신이 후보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 역시 지역감정을 완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회창 현상」의 의미는 크다. 유권자들이 대통령 선거에 어떤 꿈을 걸게 되었다는 사실, 여도 야도 그 소중한 의미를 새기며 대선을 향해 가야 한다.<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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