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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과 법치(다큐멘터리 세종대왕: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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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과 법치(다큐멘터리 세종대왕:11)

입력
1997.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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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도 하늘이 내린 백성이다”/10세이하·80세이상 하옥 금지/속육전 등 법전정비 공평한 형벌 애써/중죄인엔 3심제·감옥환경도 개선/관노 ‘100일간 출산휴가’ 법제화세종 9년 1427년 8월 어느날. 형조판서가 길을 가다가 해골과 다름없는 몰골을 한 노비가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다. 집현전 응교(정 5품) 권채의 노비였던 그는 달아난 죄로 붙잡혀 고초를 당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세종은 이를 보고 받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는데 권채 부부가 판서의 무고라고 주장하자 형조(법무부)에 이렇게 명했다.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민을 차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권채의 잘못이라는) 증거가 이와 같이 명백한데 기어코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형벌로 신문할 것이다. 노비도 하늘이 내린 백성이다. 신하된 자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족한데 어찌 멋대로 형벌을 주어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는 주인이 노비를 때려 죽이는 일이 흔했다. 그래도 주인의 행위는 무조건 옳은 것으로 인정됐다. 세종의 이같은 처사는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대왕은 이처럼 사회 최하층민에 대해서까지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처우를 해주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은 법률의 정비로 나타났다. 그 결과물이 이·호·예·병·형·공 육조의 분야별 기본법을 담은 「속육전」과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시행령 따위를 모은 「등록」이었다. 이 법전들에 담긴 정신은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는 휴머니즘적 법치주의」로 성종 때 완성되어 이후 조선왕조의 기본법이 된 「경국대전」의 줄기를 이루게 된다.

대왕은 인신의 문제를 다루는 형사 분야에 유달리 관심을 쏟았다. 세종 13년 1431년 6월2일, 본인이 직접 관여한 재판사례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형조에 내린 하교를 보면 그의 정신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 지를 알 수 있다. 『(함경도) 영흥부 창고가 도둑을 맞았는데 누군가가 익명으로 갓동이 등 노비 세 사람의 짓이라고 무고했다. 부사는 이들을 잡아들여 고문까지 했으나 증거가 없어 석방했다. 얼마 후 다시 무기고에 불이 났는데 (셋중 의심받을까 지레 겁을 먹은) 두 노비가 달아나자 부사는 이들을 방화범으로 단정하고 갓동이를 잡아 심히 고문해 자백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여러가지 정황이 의심스러워 사건을 철저히 조사토록 했더니 아닌게 아니라 그런 사실이 없었다. 신문대장을 보니 갓동이가 매를 맞은 것이 1,300여대나 됐다. 「매질 밑에서는 무엇을 요구해도 얻지 못할 것이 없다」더니… 형벌이란 사람의 생사가 달린 것이니 진상은 밝혀내지 못한 채 매질로 자백을 받아서 죄가 있는 자는 요행히 면하게 하고, 죄가 없는 자는 허물에 빠지게 하면, 형벌이 공평치 못해 원망과 억울함과 원통함을 풀지 못하게 된다… 슬프도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벌로 팔다리를 잘린 자는 다시 붙일 수 없으니, 한 번 실수하면 후회한들 돌이킬 수 있겠는가. 죄수가 순순히 자백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재판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 말며 여러 방면으로 따져묻고 되풀이 해 찾아서 죽은 자가 구천에서 원한을 품고 산 자가 한탄을 품지 않도록 할 일이다. 형조는 이 지극한 뜻을 깊이 유념해 널리 알리라』

한마디로 사건을 최대한 신중히 다루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며 형벌을 관대하게 하는 흠휼관형의 정신이었다. 이같은 정신은 구체적인 형사제도로 표현된다. 세종은 법 규정 이상의 형벌이나 고문을 금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죄인에 대해서는 삼심제도를 실시했다. 15세 미만 어린이와 70세 이상 노인은 살인·강도죄가 아니면 옥에 가두지 못하게 했고 10세 이하와 80세 이상인 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더라도 가두지 못하게 했다. 특히 감옥 환경이 열악해 구속기간에 숨지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옥의 구조와 환경을 개선토록 했다.

심지어는 법의학서인 「신주무원록」을 발행, 살인사건은 철저한 규정에 따라 조사하도록 했다. 또 관청에 딸린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일주일 뒤부터 근무토록 돼 있던 것을 산달과 산후에 걸쳐 100일 동안 휴가를 주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병호 객원교수(전 서울대 법대학장)는 지난 5월 「탄신 600돌 기념 21세기 문화·과학을 위한 세종대왕 재조명」 세미나에서 『세종대의 법과 법사상에는 서구적 근·현대법과 유사한 정신과 논리가 받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우리 전통시대를 비합리적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독단』이라고 지적했다.

세종의 모든 업적은 신하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실행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나 휴머니즘과 법치주의 정신에 있어서만은 그 누구도 대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돋보기/신주무원록/죽은 자 원한없게 하는 법의학서/시체 검안방법·사례까지 상세히

세종 때는 누가 독살됐을 경우 어떻게 사건처리를 했을까.

일단 관할지역의 장이 직접 검시를 맡아 피부의 반점 같은 것을 상세히 조사해 정해진 서식에 맞춰 형조에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이 당시 검시방법과 조사·보고 규정을 담은 것이 「무원록(죽은 자의 원한이 없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원래 1308년 중국 원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세종 원년 1418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했다.

그러나 우리 관습과 규례에 맞지 않는 것이 많고 해석도 어려웠다. 그래서 세종은 여기에 상세한 설명을 붙여 「신주무원록」(1438년 11월)을 펴내도록 했다. 이 책 상권은 시체에 난 상처의 길이 너비 깊이 등을 자로 재는 등 시체를 검안하는 방법과 그 사례가 수록돼 있고 하권은 43개 항목에 걸쳐 각종 법의학 지식을 담고 있다. 부검까지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사인을 가려내는 방법에는 놀라운 과학성을 지닌 것이 많다. 무원록은 명·청대에는 별로 쓰이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신주무원록은 조선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지는데 나중에 다시 일본에서 중국으로 역수입되기도 했다.

◎세종 어록

『대개 젊어서 호화사치에 물들면 장성하여 교만·나태하고, 젊어 고생을 겪으면 커서 성취함이 있다』(세종실록 85권 21년 5월4일조, 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이 지나치게 여자를 밝혀 자주 말썽을 일으키자 자녀들을 질책하면서 한 말).

『과거 시험에서 선비에게 (국가적 문제에 대해) 대책을 묻는 것은 바른 말을 꺼리지 않는 선비를 구하려는 것이다. 나의 잘못을 심하게 비난했다 해도 그 말이 맞는 것이라면 마땅히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실록 81권 20년 4월14일조, 이해 4월11일 과거에서 임금의 잘못을 심하게 지적한 하위지(후일 사육신의 한 명)의 장원급제를 최종 승인하면서 한 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적 제스처」가 결코 아니었다).<이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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