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각기의 집단 발생은 역설적이게도 기술 발달의 산물이었다. 이 무렵 아시아 각국에는 증기기관에 의해 쌀과 밀의 도정기술이 도입됐다. 이같은 도정법으로 비타민B₁을 많이 함유한 곡물껍질이 깎여나감으로써 비타민B₁ 결핍이 초래된 것이다.백미쌀을 주식으로 삼던 말레이시아의 화교농장과 주석광 노동자들은 하루 2,500㎉가량을 섭취, 열량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비타민B₁부족으로 각기환자가 늘어났다. 당시 각기에 의한 사망률은 매우 높아 그 곳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 2,400명중 800명가량이 2년동안 각기로 숨졌다. 그러나 인근 고무농장에서 일하던 인도인 노동자나 말레이시아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도정한 현미를 섭취한 덕분에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
거의 백미만 먹던 일본 해군병사들에게도 각기가 집단 발병했다. 1878년에는 수병 1,000명당 300명가량이 각기환자로 보고됐다. 깜짝 놀란 일본군 지휘부가 병사들의 식단을 밀 보리 강낭콩 우유 소고기 등의 혼합식으로 바꾼 결과 2년도 안돼 각기병 환자는 생기지 않았다. 이런 쓰라린 경험들을 통해 각기의 발병과 음식물의 연관성이 드러났지만 막상 각기의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는 데는 한 뛰어난 의학자의 등장을 기다려야만 했다.<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황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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