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살을 포착하려는 시적언어의 집요함90년대 들어와서 「몸」이 우리 시의 강력한 주제어가 된 것은 여러가지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다. 시가 집단적 이념의 표출이나 「음풍농월」의 수준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신체적 감각 안에서 시를 출발시키고 그 감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려는 시도가 필요했다. 인간이라는 욕망의 덩어리가 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싸늘한 진실이 아니라 감각의 갱신을 위한 성찰의 조건이다.
채호기 시인 역시 「몸」에 관한 일관된 탐구를 보여왔다. 그는 이미 앞의 시집 「슬픈 게이」에서 「너의 죽음」과 「게이」라는 시적 계기를 통해 그 탐구를 실천한 바 있다. 새 시집 「밤의 공중전화」(문학과지성사 발행)는 「너의 몸」에 관한 감각의 언어화가 보다 세밀한 관능의 형식으로 드러나 있다. 채호기 시인에게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몸」이 아니라, 「너의 몸」이다. 「너의 몸」은 「나의 몸」이 그것과 소통하여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감각을 예각화하는 매개이다. 「너의 몸」때문에 「나의 몸」은 몸이 된다.
그의 시는 「사랑의 감각은 살에서 온다」 혹은 「소통의 저 밑바닥 본질적 소통에는 언제나 섹스가 숨어 있다」는 명제에 대한 추구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감각! 사랑의 근육! 사랑의 신경! 사랑의 살!」을 포착하려는 시적 언어의 집요함이다. 가령 「너의 몸」이라는 시에서 「손이 흘러 넘치면 눈이 된다. 몸 밖의 사물을 포착하는 눈이 아니라 살과 근육과 뼈와 피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감각을 포착하는 눈!」 「그리움은 눈으로 들고 사랑은 손끝에서 작렬한다」라는 귀절을 읽을 때, 우리는 「손」이라는 신체의 감각이 「너의 몸」을 스칠 때의 그 미세하고 붙잡을 수 없는 감각의 신비를 다시 경험한다. 그래서 시는 해석되기보다는 경험된다. 하지만 「너의 몸」은 역설적으로 「나의 몸」의 캄캄한 고독을 환기시킨다. 「너의 몸」은 내가 만지고 싶지만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차원에서 「너의 몸」은 「내」가 겪는 모든 모순된 감각적 경험의 대상이자, 근원이다.<서울예전 교수·문학평론가>서울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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