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압정치불구 비전 제시한 지도자”“오늘날 우리사회 문제들의 시발점”/타협 불가능한 두 견해가 평행선『나라가 어려울수록 박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의 혁명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하면 된다는 것을 국민에게 심어준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요사이 정치상황을 보면 자꾸 박대통령의 역사·경제·사회적 존재 및 가치에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박대통령같은 민족 지도자가 또 다시 군에서 배출되기를 간곡히 기원한다』(인터넷 「박정희기념관」 사이트 방명록 중)
『친일파로서 일왕에게 무릎을 꿇은 그. 세상의 윤리를 송두리째 뽑아던지고, 대기업 위주의 정책으로 중소기업을 파괴한 경제 원흉. 자신의 가족을 빼고는 철저하게 인권을 증오하고 무시했던 살인마. 누가 경제를 살렸단 말인가. 독재를 누가 찬양하는가… 』(PC통신 천리안 박정희서비스 게시판 중)
「민족사 3대 영웅의 하나」에서 「나라를 망친 원흉」에 이르기까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달린다. 정치권 바람을 등에 업고 불어닥친 박정희신드롬 속에서도 도저히 타협이 불가능한 극단의 견해가 맞부딪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모임」의 감사 신현채(61·한국기술금융 감사)씨는 『보릿고개를 겪어보지 못하고, 배고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욕한다』고 말했다. 『5·16 당시는 1인당 국민소득이 90달러도 안 되고 구호물자에 매달려 살면서도 사색당파만 일삼던 시절이었다. 그가 없이는 경제부흥은 불가능했다. 오늘의 가치기준으로 그 시대를 평가절하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논지.
그런데 실제로는 전쟁도, 빈곤도, 군부독재도 겪어보지 못한 신세대들이 박정희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박근혜(21·여·한양대 3)씨. 『대통령으로서 박정희같은 사람이 더 낫다고 봅니다. 독재나 장기집권 등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새마을운동이나 경제개발 등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잖아요.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것도 그 시대 덕 아닌가요』
서영준(32·자영업)씨는 『이 시대에 박정희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민주화나 억압정치는 나쁘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가요』.
같은 30대지만, 장경영(37·회사원)씨의 견해는 정반대이다. 『우리나라 민주화를 뒷걸음치게 한 장본인의 망령이 부활하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경제지표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러는 동안 정치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후퇴했고, 인권은 무자비하게 탄압당했죠. 5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역사를 거꾸로 가게 한 인물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많은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대통령 박정희 보다 인간 박정희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박정희를 모델로 소설 「인간의 길」을 쓴 작가 이인화(31·이화여대 국문과 교수)씨는 『박을 정치적으로 복권시키려는 의도는 없다. 양면성을 가진 「영웅」적 인간으로서 그를 흠모한다』고 말했다.
강만길(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때아닌 박정희 희구에 대해 『대단히 우려스럽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시대착오적 희구는 문민정부 개혁의 실패와 그에 따르는 실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정경 유착, 부정 부패, 경제체제의 모순 등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박통시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김경화 기자>김경화>
◎박정희 추모모임 민족중흥회/“응당 존경받을만큼 받을뿐”/3·4공 관료 등 회원 3만명/84년 창립이후 매년 추도식/“수구세력” 눈초리 따갑지만 30·40대 가입 부쩍 늘어
『박정희 대통령이 왜 독재자입니까? 국민이 따라주지 않는데 총칼만으로 경제개발이 가능했겠습니까? 경부고속도로 건설만 해도 그렇습니다. 언론이고 지식인들이고 모두들 국민 여론을 빙자해서 격렬히 반대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됐습니까?』 「민족중흥회」 사무국장 강양식씨의 말이다.
매년 박 전대통령 추도식을 가져 널리 알려진 「민족중흥회」는 박 전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주로 3, 4공화국 당시 관료, 의원, 군 인사 등의 주도로 84년 12월 18일 창립됐다. 매년 10월26일 기일이 되면 어김없이 추도식을 가지며, 관련 자료수집 및 제공 등의 일도 하고 있다. 회원은 전국에 약 3만명, 살림은 운영위원회원 400여명이 내는 회비로 충당한다. 창립 초기에는 추도식도 제대로 못했다. 5공 정권에서 모임 자체를 못마땅해 했기 때문이다. 추도식 참가 서신이 번번히 기일이 지나 배달되는 바람에 표가 안 나도록 회원들이 우체국 수십곳에 흩어져 조금씩 나누어 발송했던 기억도 강국장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86년부터 12년째 줄곧 민족중흥회 일을 해오면서 『박전대통령은 독재자, 중흥회는 수구집단』으로 치부해 버리는 눈초리를 견뎌야 했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 『무슨 큰 이익이 있어 이 일을 하겠습니까? 그저 고인의 가려진 업적과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에 이 일을 할 뿐입니다. 지도자적 자질만 보더라도 박 전대통령은 강력한 지도력과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 그리고 실천력까지 겸비한 인물로서 21세기 미래형 지도자의 전범이 될 만합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할 일이 많다는 얘기도 되지요』
중흥회에는 작년부터 30∼40대 젊은층의 회원 가입이 부쩍 늘고 있다. 최근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인터넷의 「박정희 전시관」 사이트 등 각계각층에서 자발적인 모임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신드롬이라니요? 응당 존경받아야 할 분이 뒤늦게나마 올바로 알려지는 것 뿐입니다』 강국장은 『앞으로 할 일이 더욱 많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황동일 기자>황동일>
◎당시 재야운동 심재권씨/“70년대 정말 끔찍했습니다”/대통령을 체육관서 뽑고 국회의원을 마음대로 지명/가족끼리도 말조심해야했던 민주주의의 암흑기
『70년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대통령을 2,300명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뽑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던 민주주의의 암흑기였습니다. 나랏일에 관해서는 심지어 가족끼리도 말조심을 해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사헌부, 사간원 같은 강력한 군주 견제장치가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박정권은 자유당 정부보다 훨씬 퇴행적인 권위주의 체제였습니다』
박정희신드롬을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혹독한 핍박을 받았던 「재야운동가」들이다. 청장년기를 박정희정권과의 싸움에 바쳤던 그들이 박정희신드롬에 대해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70년대 재야운동 내내 핵심 이론가이자 조직가로 활동했던 심재권(50·국민회의 강동을지구당 위원장)씨.
「박정희 신드롬」은 그에게 더욱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주변에서 제2의 박정희가 나와야 한다, 박정희야 말로 민족지도자였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그럴까?」 「그건 아닐 거다」라고 되뇌어보곤 합니다』
특히 비판적 지성의 요람이어야 할 대학에서까지 박 전대통령을 복제하고 싶은 인물로 꼽았다는 기사를 접했을 땐 절망감이 들었다. 「역사란 무엇인가」 「사회정의는 있는가」하는 깊은 회한을 감출 수 없었다.
71년 민주수호전국학생연맹 위원장, 같은 해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투옥. 73년 10월 국내 최초의 유신반대 서울대학생 연합시위 주도로 7년에 걸친 수배생활 시작. 80년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으로 82년 12월 투옥, 83년 호주로 강제출국, 망명생활 시작….
94년 귀국해 5살짜리 딸아이를 둔 어엿한 가장이 됐지만 그에게 「박정희 시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진작 청산됐어야 할 부끄러운 과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막대한 정치자금 수수를 추궁하는 국민들에게 「과거로부터의 관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과거란 게 무엇입니까? 박 전대통령의 금권정치입니다. 한보사태에서 드러난 정경유착의 거대한 사슬, 망국적 지역주의 등 온갖 해악의 뿌리가 박정희 정권에 있습니다. 70년대는 절대 역사란 이름으로 미화하거나 덧칠할 수 없는, 여전히 우리 삶을 속박하는 현실입니다. 이 역사의 악순환을 단호히 끊어내지 않고서는 아무런 미래도 기약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박정희신드롬에 손을 내저었다.<황동일 기자>황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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