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잡기 발버둥에 여당 경선주자 마다 “계승자” 한목소리/야당후보들까지도 보수층 노린 카드로 활용『내가 되고 싶은 지도자는 세종임금, 흥선대원군, 박 전대통령 같은 사람』(박찬종), 『나는 박 전대통령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기록을 보니 키가 1㎜도 틀리지 않는다』(이인제), 『박 전대통령의 비전과 추진력, 그리고 국민의 에너지를 한 곳으로 결집해내는 지도력은 오늘과 같은 위기상황에 꼭 필요한 지도자의 덕목』(최병렬), 『박 전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집념의 정치 지도자이며 5,000년 보릿고개를 추방한 분』(이한동), 『민주적 경영능력까지 갖춘 21세기형 박정희 리더십을 보여주겠다』(이수성)
9일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주자들의 대구·경북지역 대의원 합동연설회장. 경선주자들의 입에서는 박전대통령에 대한 최상급의 찬사와 다짐의 말들이 쏟아졌다. 구여권 출신인 이한동, 최병렬 후보는 물론 개혁과 세대교체의 대표주자를 자임하는 이인제, 박찬종 후보까지 「박정희 계승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합동연설회장을 빠져나가던 한 대의원은 『여기가 박정희 추도회장인가, 연설회장인가? 아무리 표가 급하다고 해도 고인까지 끌어들여 마구잡이로 지역감정을 부추켜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박정희 신드롬」은 선거철이면 으레 재연되는 말잔치 수준이 아니다. 신한국당 대선주자들 사이에서는 「뉴 박정희론」 「민주 박정희론」같이 제법 정교한 논리틀을 갖춘 박정희론까지 나오고 있다. 그래서 신한국당 주변에서는 대통령 후보의 방향은 「김심」이 아닌 「박심」에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들린다.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최근 주창한 이른바 「신광개토대왕론」은 박 전대통령의 「조국근대화론」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종필 자민련총재는 박 전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다는 것 자체를 큰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 얼마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자민련 중앙당 후원의 밤 행사에서는 3, 4공을 망라한 구여권 인사 1,000여 명이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때문에 『정치권이야말로 박정희 신드롬의 진앙지』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박 전대통령이 최고의 「정치상품」이 되고 있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신한국당 대의원들을 잡기 위해서다. 『대폭 늘어난 대의원들 중 순수 민주계는 20% 남짓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구여권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수안정희구세력이다. 어떤 점에서는 대의원들 중 상당수가 문민정부보다는 오히려 유신시대와 정서적·정치적 공감대를 많이 갖고 있다』는 신한국당 한 관계자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일반인 상대 여론조사에서는 중·하위권에 머물러온 이한동 후보가 합동연설회 후 대의원 여론조사에서는 줄곧 2∼3위권을 지키는 것도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보수적 기류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의원 지지도 선두를 넘볼 정도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이인제 경기도지사의 인기는 상당부분 박 전대통령의 외모, 말투를 쏙 빼닮은 덕분이라는 점 또한 주지의 사실.
신한국당 경선이 별 쟁점이나 정책대결 없이 진행되면서 득표전략의 상당부분을 지역정서에 기대고 있는 것도 박정희 신드롬의 한 요인이다. 특히 대구·경북표가 신한국당 경선뿐 아니라 대선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박정희 시대」에 대한 이 지역의 향수를 이용한 노골적인 지역감정 부추기기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의욱 공선협 정책부장은 『박정희 신드롬은 우리 정치권의 수준을 보여준다. 경선주자들은 확고한 역사의식,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고사하고 자기가 했던 말과 과거 행적까지 스스로 부정해버린다. 대구에 가서는 박정희를 잇겠다고 하고, 광주서는 독재와 맞서 싸웠다고 말한다. 국민의 눈과 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말했다.<황동일 기자>황동일>
◎박정희 연구 “미흡”/문민정부이후 본격화/최근의 학문적 관심은 무리한 성장·재벌정책 등 경제정책 실패규명 초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시대에 대한 학문적·역사적 연구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박정희에 대한 연구는 박정희 신드롬을 바로 볼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에 그가 죽은 후 18년은 아직 짧다고 하겠지만, 학계에서는 그렇다하더라도 지금까지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5, 6공화국 시절은 자유롭게 박정희를 언급할 시대 상황이 아니었다. 연구가 있었다 해도 저널리즘 수준이거나 박정권 경제정책의 성과에 대한 것이 고작이었다.
문민정부 중반 이후에 박정희의 정치적 리더십을 다룬 논문이 나오는 등 비로소 그가 본격적인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95년부터 김일영(성균관대 정치학과), 이병천(강원대 정치학과) 교수, 류상영(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박사 등 소장파 학자들이 잇달아 박정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논쟁이 활기를 띠고 있다.
한국정치연구회(회장 손호철·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8월말께 박정희신드롬, 박정권의 정치독재, 산업화 전략, 대외관계 등을 다룬 본격적인 연구논문집 「박정희 시대 연구」를 펴낼 계획이고, 그의 인생과 치적을 본격적으로 다룬 「박정희평전」도 올해 내로 출간될 예정이다. 바야흐로 박정희 논쟁이 학문의 장에서 달아오를 상황이 된 것이다.
정치권의 「박정희 신드롬」은 밑도 끝도 없이 「경제를 살려낼 제2의 박통」을 장담하는 대권주자들을 만들어냈지만, 최근 학문적 관심사는 오히려 박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를 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 경제의 위기는 박정권 당시의 무리한 성장정책과 재벌 위주의 산업육성책이 자초한 것이 아니냐는 인식이 깔려있다.
류상영 박사는 『박정희 시대의 무리한 「압축성장」이 정경유착, 재벌위주 산업구조, 거대기업의 부실성장, 지나친 보호무역으로 인한 기업자생력 상실 등 당면한 경제문제의 근본 원인』이라며 『국가 위기에 대한 실망감이 오히려 원인을 제공한 과거에 대한 희구로 나타나는 것은 아이러니』라며 박정희신드롬을 진단했다.
「박정희평전」을 공동집필중인 한국정치연구회 정해구(한신대 강사) 박사는 『지금까지 박정희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보수·개혁 등 이데올로기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를 규정하는 박정권시대에 대한 차분하고 객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김경화 기자>김경화>
◎나는 이렇게 본다/한상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빈곤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정신적 공황/그것을 파고드는 ‘신드롬’
얼마전 경제인들의 조찬모임에서 「한국사회의 위기와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원래 박정희의 공적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편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의 질곡과 위험, 모순이 박정희시대의 유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김영삼정부는 이 유산을 극복하기는 커녕 이에 휩싸여 침몰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명백했다.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발전적으로 마감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진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격렬한 반응이 나왔다. 정서적 항변에 마음이 아팠다. 어느 사장의 말이다. 『우리는 지금 마음의 공황상태에 있다. 두 전직대통령은 감옥에 있고 김대통령은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누구 하나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정말 살 맛이 안난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온 몸을 다 바쳐 우리 민족을 빈곤에서 해방시켰다. 경제가 발전해야 민주주의가 이룩되고 통일도 된다고 일찍이 갈파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역사가 지금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당신은 왜 우리에게 위안과 감동을 주는 유일한 존재, 박정희 상징마저 무너뜨리려 하는가?』
박정희 신드롬은 우선 김영삼정부의 실정 탓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사회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해방, 혁명, 근대화, 개혁 등의 이름으로 지난 1세기동안 부정되었던 과거를 긍정하려는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다. 물질적 빈곤이 사라진 자리에 정신적 공황이 들어섰다. 모든 권위는 무너졌고 지도자는 상처투성이의 죄인으로 퇴장했다. 이 척박한 정신풍토, 의미의 고갈, 결핍의 시대가 빈곤을 벗어난 사람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이런 대중심리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박정희와 결합한 자기긍정의 기표는 건강한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의 공적, 즉 산업발전, 부국강병, 자기헌신,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백번 옳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그에게 빚진 것이 많다는 의미에서 박정희를 존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복합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박정희는 과연 매력적인가? 그를 존경한다는 기업인들 조차도 우리가 박정희시대로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의 해답은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억압했고 인권을 탄압했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추진했던 발전정책은 지금도 타당하다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게 응시해 보면 박정희의 「돌진적 근대화」가 전례 없이 빠른 물량적 성과를 내면서 또한 오늘의 가공할 위험사회를 만들어 냈다는 데 하등의 의문이 있을 수 없다.
청와대로부터 시작하여 기업, 언론, 대학까지 만연된 권력의 집중화, 재벌공화국의 등장, 구조화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속전속결의 외형적 성과주의, 그에 따른 건축의 부실화와 삶의 안전 위협, 물질만능주의 가치관, 지역차별, 냉전적 흑백논리, 환경오염과 파괴 등 인간다운 사회 건설을 가로막는 거의 모든 족쇄들이 사실은 박정희시대의 유산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기긍정의 욕구는 정당하지만 박정희 신드롬은 자칫하면 복고주의로 연결될 지도 모른다. 자기긍정의 욕구는 훨씬 유연하고 풍부하게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박정희의 환생이 아니라 그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비판적 대결을 요구한다. 박정희의 돌진적 근대화는 분명 성공했고 이것은 우리에게 다행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대를 실질적으로 마감하고 새로운 질적인 도약을 성취할 때이다. 그런 능력을 갖춘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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