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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 시아누크 ‘용의 눈물’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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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 시아누크 ‘용의 눈물’ 언제까지

입력
1997.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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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등극 70·79년 두차례 망명/암투병 북경체류 3번째 망명 위기/아들 라나리드도 비운 대물림「캄보디아 시아누크가의 불운은 이어질 것인가」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킨 훈 센 제2총리가 대세를 장악하며 노로돔 시아누크(75) 국왕의 거취가 주목되고 있다. 신병 치료차 베이징(북경)에 머물고 있는 그가 또다시 긴 망명의 길에 올라야 할 것인지, 그리고 아들인 노로돔 라나리드 제1총리를 비롯한 일가가 그의 불행한 전철을 되밟을 것인지가 관심이다.

시아누크가 왕위에 오른 시기는 1941년. 당시 식민종주국이던 프랑스는 모니본왕이 사망하자 아들인 스라말릭을 제치고 19세에 불과한 손자 시아누크를 간택했다. 하지만 만만했던 청년 시아누크는 2차대전후의 혼란을 틈타 53년 독립을 쟁취하며 확고한 국부 지위를 굳혔다. 이어 그는 사회민주공화제를 표방, 왕권은 부친에게 줬지만 자신은 국가주석으로서 통수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동서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운명은 자명했다. 「줄타기의 명수」소리를 들으며 양진영사이를 오가던 시아누크는 70년 소련 방문중 일어난 론 놀 장군의 친미쿠데타로 1차 중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75년 크메르 루주 정권이 들어서며 주석에 복귀했으나 곧 연금상태에 들었다가 79년 베트남 침공과 더불어 2차 망명했다. 이후 10여년만에 국왕으로 돌아온 것이 이번에 파국을 맞은 연정체제이다. 전립선암과 당뇨를 앓고 있는 그로서는 이번에 3번째 망명할 경우 「불귀의 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불행은 가문안에서도 되풀이 됐다. 흔히 후계직을 둘러싼 궁정 암투이다. 그는 네번째 부인인 모니크 왕비를 포함해 모두 6명의 부인으로부터 14명의 자식을 뒀다. 그중 6명이 70년대 내전중 숨져 현재는 아들 5, 딸 3명이 남아있다. 장남은 아바니스로 미국에서 돌아온 뒤 사원건립 등 종교일에 관심이 깊다. 프랑스계인 모니크왕비쪽도 시아모니, 나린드라퐁 두 아들이 있으나 이들은 권력욕이 없는 편이다. 문제는 아바니스의 동생인 차크라퐁과 이복인 라나리드간의 갈등이다.

라나리드는 94년 시아누크의 총애가 차크라퐁으로 기울자 쿠데타 혐의를 걸어 그를 프랑스로 축출했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다. 라나리드는 이어 95년 11월 시아누크의 동생인 사리부드마저 프랑스로 쫓아내 후계자지위를 탄탄히 했다. 하지만 외유중 일어난 훈 센의 기습공격에 이제 가문마저 풍비박산날 위기에 처하게 됐다.<윤석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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