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경우에서 보듯 「탈출」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정치체제가 절망적 상태에 이를 때의 마지막 선택이다. 독재정치 등에 대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염증에서 비롯되는 국민들의 탈출은 그 사회가 내부로부터 붕괴되고 말 것이란 강력한 조짐이다.50, 60년대 동독은 총격사살과 베를린장벽으로 국민들의 서방탈출을 차단했으나 결국 89년 수천, 수만명이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을 통해 집단탈출을 감행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체제가 머지않아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되는 것도 황씨의 망명에서 절정을 이룬, 끊임없는 탈출사태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우리사회도 절망적 정치·사회 상황이 낳은 탈출러시를 경험한 적이 있다. 70년대의 이른바 「도피이민」이다. 유신과 긴급조치의 공포정치, 극심한 빈부격차와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지는 경제·사회 환경속에서 수십만명이 미국으로, 캐나다로 떠났다. 정치현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고뇌의 결과이든, 선진국의 부를 좇는 철저한 실리계산의 끝이든 그들에게 70년대 한국은 견디기 어려운 질식의 땅이었다. 50, 60년대 미국등지로 유학갔던 엘리트들에게도 한국은 차마 돌아가기 힘든 곳이었다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가 절망의 땅을 상징하는 독재자라면 우리는 3선개헌과 유신을 강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집단탈출과 다름없는 도피이민의 삭풍을 몰아치게 했던 장본인이다.
북한을 탈출한 황씨가 독재체제의 참상을 고백하는 이즈음, 박정희 향수가 날로 번지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할 대통령 후보들마저 1970년대의 절망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 땅에 역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자괴하지 않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착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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