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대신 경수로 요청한 것이 증명/한반도 비핵 합의는 남 분열 노린 것황장엽씨는 10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북한에서 직접 핵무기를 본 적은 없지만 핵무기가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핵무기 존재여부를) 증명은 못하겠지만 북한에 핵무기가 있다고 보고 대비책을 세울 것』을 충고했다.
북한핵문제와 관련, 그는 관계당국 조사에서 김일성이 64년 중국의 핵실험에 대해 『장수가 바지벗고 칼차는 격』이라고 말했던 점으로 보아 당시만 해도 핵무기를 가지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 84∼85년께 당시 주평양 소련대사가 자신에게 『북한이 핵을 개발한다는 말이 많은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면서 핵확산금지조약(NPT)가입을 종용한데 대해 그는 『그런게 있겠는가』하는 식으로 대응한후 이를 김부자에게 보고하자 김부자로부터 『묵살하라』는 지시를 받은바 있다고 한다.
또 김영남 외교부장은 85년 12월 NPT에 가입하고 92년 4월 핵안전협정을 체결했으나 군수담당 관계자들은 『NPT 가입으로 골치가 아프게 됐다』면서 김을 비판한 바 있다.
황씨는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특별 사찰문제가 제기되자 북한이 93년 3월 NPT를 탈퇴했다는 점에서 모든 당 비서들이 그렇게 믿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북미핵협상시 모든 전략은 김정일이 강석주를 통해 직접 지시했으며 여타기관은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다.
또 북한이 화력발전소 대신 경수로 지원을 요청한 것은 화력발전소의 경우 완공후 유류 등 원료공급 능력이 없는 반면 경수로는 연료인 우라늄이 대량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
그는 경수로 건설과 관련, 남측인력이 대규모 방북하면 북한은 신포 인근을 철저히 통제, 북한주민과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합의한 동기는 대외적으로 평화 이미지를 과시하고 남한 내부의 핵관련 정책분열을 조장키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또 85년 12월 북한의 NPT 가입은 구소련으로부터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지원을 얻기 위한 것으로 실제로 같은달 북한은 구소련과 440㎿ 경수로 4기 공급협력협정을 체결했다.
92년 4월 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한 것과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94년 10월) 등은 모두 시간을 벌기위한 전략에서 추진되었고, 그 결과 북한은 경수로 건설과 매년 50만톤의 중유획득 등 이득을 보게 됐으며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일부 고위층 간부들은 92년 4월 IAEA와 핵안전협정 체결 이후 핵사찰 문제로 인해 대북한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자승자박한 것이 아닌가 하고 외교부에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고 한다.<홍윤오 기자>홍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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