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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멋진 너처럼?/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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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멋진 너처럼?/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입력
1997.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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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수위 청소년 폭력/성찰없는 모방의 몸짓/근본원인 제공자는 꿈을 꺾는 교육이다학교폭력이 위험수위를 넘었다. 여러 공식기관의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의 60% 이상이 또래집단의 폭력을 직·간접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그것도 여학생층과 저연령층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 패스파인더의 화성착륙에 선진국의 청소년들이 과학자의 꿈으로 부풀어 있을 이 시점에 우리 아이들은 일본만화에 탐닉하여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듯해서 낭패감을 지울 수 없다. 청소년 비행과 범죄는 어느 국가에든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몇년동안 경악스러운 형태로 폭증일로에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청소년 범죄집단의 정서를 영상화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번창하는 뉴욕의 뒷골목 풍경이다. 그렇듯이 「어린 비행집단」은 산업화과정에서 낙오된 빈민층 자녀들의 「사회학적 질병」쯤으로 인식되었다. 흔히 「길거리집단(street corner society)」으로 알려진 이들에 대한 치유방식은 자연히 일터를 지켜가는 중산층의 근면성을 전파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아들은 빈민과 결손가정 뿐 아니라 풍요한 중산층에서도 폭넓게 배양되고 있기에, 건전한 상식과 근면성의 미덕만으로는 치유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히려 우리의 청소년폭력은 「욕망의 억압」이라는 사회심리학적 차원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청소년은 꿈으로 가득찬 연령집단이다. 꿈은 좋은 욕망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들이 좋은 욕망을 표현하고 구체화할 시간과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인내심있는 청소년이라면 그 꿈의 성장을 멈추게 하겠지만, 대체로 좌절된 형태로 남겨두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이렇게 「꿈을 죽이고」 살아온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빈곤의 시대」도 「혁명의 시대」도 아닌 요즘 청소년들은 좌절된 욕망을 보상받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욕망을 투사할 대상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도 멋진 네가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멋진 너」는 가정과 학교근처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더욱이 그 「멋진 너」가 부정과 비리에 찌든 우리 사회 일반에서 찾아지리라고 기대하는 기성세대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초라하게 좌절시킨 현실에 본때를 보여주는 폭력집단, 또는 현실규제의 장벽을 손쉽게 뛰어넘고 골탕먹이는 범죄집단이 투사된 욕망의 대리인으로 등장할 개연성이 커지는 것이다.

여기까지도 큰 문제이지만 대리인의 행위를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를 모방하여 스스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여과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은 더욱 중대한 문제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어떤 정신적 결핍증에 걸려있다는 징후이다. 성찰의 결핍, 철학의 결핍, 주체성의 결핍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학교폭력은 좌절된 욕망의 보상심리이며, 「이유있는 반항」 끝에 오는 「성찰없는 모방」의 안타까운 몸짓인 것이다.

학교폭력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일대 소탕전을 선포한 정부의 정책은 이런 의미에서 무지하기 짝이 없다. 기존의 선도나 계몽활동이 이제는 한계에 달했다는 점은 수긍이 가지만 연령과 원인을 도외시한 무차별적 소탕전은 나이 어린 범죄자를 양산하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범죄원인의 제공자는 이들의 꿈을 좌초시키는 교육현실이며 이들의 푸른 상상력을 과외와 학원에 가두어 두는 교육정책이다. 또는 저질의 사이버게임과 폭력게임, 환각과 성적쾌락 같은 손쉬운 욕망의 자료를 무차별적으로 제공하여 반사적 이득을 취하는 오락산업이야말로 범죄형성의 공모자들이다.

누가 우리의 청소년들로부터 좋은 욕망의 준거들을 빼앗았는가. 뛰어난 문화인, 예술가와 문인, 그리고 수많은 위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현란한 치장과 몸짓으로 절어있는 단명의 어린 가수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사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는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문제아들이 사랑으로 치유되었다면, 우리의 문제아들은 입시교육에서의 적절한 해방이 최선의 치유책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 다른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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