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연재를 시작하며/“격동기 한국사 비화 밝히겠다”/“수많은 사건·사람들 일화형식으로 기술/때로는 한미관계 민감한 부분도 다룰 것”한국과 미국에 있는 많은 친구들은 한국과 40년 이상 인연을 맺어온 나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써보라고 오래전부터 권유해왔습니다. 비극적 전쟁에 따른 파괴와 빈곤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당당한 주역으로 성장한 이 나라의 불가사의한 역사에서 나는 수많은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950년이후 한국과의 만남은, 풍요롭지만 은둔적인 문화에서 대륙 곳곳에서까지 영향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역동적인 국가로 떠오른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시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학자로서 생활해 온 경력때문에 많은 글을 쓰면서 주석이 달린 길고 분석적인 이야기들을 써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온 한국과 한국민들에게서 경험했던 바를 보다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를 원해왔습니다. 때문에 나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 주요 이슈, 그리고 우연히 마주쳤던 한국에 대한 모든 기억을 일화형식으로 꾸며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러한 기억들은 풍부한 전통과 극적인 변화를 이뤄온, 그리고 긴장과 분열의 비극을 견뎌온, 그래서 독특한 현대화의 길을 걸어온 이 나라와 나와의 유대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데 하나의 모자이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소개할 일화들은 나 자신의 관찰과 해석에 기초한 것입니다. 한두가지 민감한 사안은 파문을 일으킬 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민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한국민과 한국에 대한 나의 깊은 애정과 한결같은 관심을 이해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애정은 고인이 된 나의 아내 셀레노(세니)도 마찬가지였다고 확신합니다.
냉전기의 격렬했던 투쟁을 겪지 못한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기억들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1990년대 이전 발생한 주요 현안들에 접근하려면 냉전, 즉 개방된 사회와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시기내내 나는 각 분야의 지도자들과 친구가 됐으며, 그들이 한국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 일하면서 지녔던 확신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됐습니다. 한국 국민들에게 냉전이란 북쪽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부터의 위협을 뜻했습니다. 불행히도 한반도에는 실패한 체제의 마지막 잔해가 아직도 위협적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모택동)의 묵인아래 1950년 6월25일 침략전쟁을 감행한 이후 한국의 운명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군의 능력에 의존해왔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미국의 동맹국들이 한반도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이것이 한국의 정치·사회에서 군부에 새로운 권력의 자리를 제공케 됐는데 이것은 과거의 전통과는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이어 한국이 동맹군의 일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몇몇 군 지휘관들의 중요성이 강화하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외국인 다루기, 현대적 장비를 구축하고 사용하기, 공병학과 병참학의 숙지, 민간 관심사와 관계된 문제를 다루는 실제적인 경험을 갖게 됐습니다.
한국에서의 세세한 경험을 피력하면서 나는 기관이나 조직보다는 한국 사람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출 생각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와 신의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한국사회의 유교적 전통과도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나는 지난 47년동안 훌륭한 한국사람들과 우정을 나눠왔습니다. 어떤 친구는 50년대초 미국 예일대에서 내가 가르쳤던 조교 학생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주요 인사가 된 사례는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나는 두 나라의 깊고 밀착된 인간관계의 덕을 보았으며 이는 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는 또 한미관계에서 특별한 가치를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회고록은 한국을 방문했거나 혹은 한국에 살면서 접한 모든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5년3개월 동안 발생한 사건들은 서로 겹쳐지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아내는 시대의 요구에서 벗어나 경치가 아름다운 시골 구석구석을 친구들과 평화롭게 나들이할 기회도 가졌습니다.
사건이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상징화합니다. 그리고 그 상징은 때로 어떤 이들에게는 긍정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합니다. 한 국가의 역사란 흔히 뿌리깊은 감정에서 비롯된 갈등적인 해석을 낳을 때가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독립전쟁 당시 보여준 영웅적 행동과 모진 겨울날 벌어진 밸리 포지 전투에서의 그의 지도력을 기억합니다. 한국전 당시 강추위가 몰아친 1950∼51년의 첫 겨울을 견뎌냈던 미군들의 이미지도 이와 견줄만합니다. 미국 남부에서는 남북전쟁에 관한 수많은 기억이 다양한 소설과 역사 서적의 중심소재가 돼왔습니다. 상징성과 이미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쉽사리 아물지 않는 기억들을 몰고온 중요한 상징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침략, 1950년의 한국전, 53년에서 지금까지의 판문점, 80년 광주, 83년 랑군사태, 그리고 88년 서울올림픽이 그것입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과 미국 양국을 결속시켜 주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를 갈라놓기도 한 많은 문제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나는 이런 것들의 상당수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가능한 한 명확하게 이를 표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때로 이런 문제들은 문화적 차이가 현격한 두 나라사이에서 복잡한 상호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종종 지나치게 단순화한 용어로 묘사돼 이를 설명하는데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민주화」 「세계화」 「인권」 「노동개혁」 「국가안보」 그리고 「현대화」 등이 그것입니다. 코끼리의 진실을 찾는 눈먼 사람들에 관한 아프리카의 오랜 속담이 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은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져보고 이를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만 아무도 코끼리를 완벽히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한국에서의 오랜 생활동안 겪었던 환상적인 경험에서 나는 한국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치게 됐습니다. 이에 따라 나의 삶은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81년 워싱턴 DC에서 열렸던 「한국예술 5000년전」에서 나는 풍부한 문화적 향취를 누렸습니다. 설악산과 대천 해수욕장, 용평, 경주, 제주도에서의 모험담도 있습니다. 나는 또 세대에 따라 사건에 대한 접근 방식이 변해가는 한국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현대화와 국가안보를 추구하는 한국사람에게 미국은 정답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적인 것에 대한 존경심은 빛을 잃어 갔습니다. 미국인들은 스스로가 한국인들에게 큰형이 아닌 동등한 친구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고, 개별원칙에 입각해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정세에서 높아지는 한국의 위상과 끊임없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과정에 참여하는 관찰자가 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입니다.
50년대초이후 한국에 대한 나의 글은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주를 이룹니다. 나는 가끔 한국과 미국의 동료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안보문제에 집착하는 지나친 반공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 소련과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 대한 책을 출간하면서 나는 나의 입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사람에게도 평양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신봉자라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과 한국민, 한국문화가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활기차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물론 나의 기억들은 가속화하는 변화의 시대에서 전통이 중시되는 이 사회를 감싸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 등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나는 민감한 부분을 다루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드러날 전체적인 윤곽은 이 기억과 관계된 많은 한국 친구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 또한 반영되기를 희망합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주한 미 대사직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나는 「스스로 일어선 나라」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이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전면에 자리잡은 오늘날에도 아주 적합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음악 예술 기술 산업 문학 축제 스포츠 그리고 수많은 다른 분야에서 세계가 보다 발전할 수 있도록 긍정적인 기여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1986년 11월 미 국무부와 작별을 고했을 때 나는 한국과의 관계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1년에 3∼4 차례씩 여권에 찍힌 한국 입국도장을 보면서 한국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남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다음의 한국에 대한 소묘에서 독자들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리처드 워커는 누구인가/6·25참전·대사 거친 ‘반세기 지한파’
서울에서 반미·반정부 데모가 절정으로 치닫던 80년대 중반. 당시 주한 미 대사로 있던 워커씨는 실언소동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본인은 지금도 극구 부인하고 있는 이른바 「버릇없는 자식들(spoiled brats)」사건이 그것이다. 그가 극렬데모를 주동하는 한국 대학생들을 「버릇없는 자식들」이라고 불렀다는 소식은 미국의 한 지방신문에 보도된 뒤 서울 장안에 급속히 번져나가 반미데모를 부채질했다. 워커 전 대사는 이에 대해 『내가 그런 표현을 쓴 게 아니고 한국의 택시 운전사들이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버릇없는 자식들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던 게 와전됐다』고 해명했다.
그같은 오해 때문에 워커 전 대사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그는 대사재임중 전두환 정부의 곱지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미 문화원 점거사건의 주동자들을 경기도 청평유원지로 불러 민주주의와 광주항쟁 등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가하면, 이른바 학원안정법으로 알려진 학생운동 탄압조치에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밝혀 이를 저지하는데 일조하는 등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7년전 45년을 동고동락해온 부인과 사별하고 지금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버스에서 후학지도에 힘쓰고 있는 워커 전 대사는 틈만나면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에서 혼자 거주하는 100세 노모를 찾아뵙는 소문난 효자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치는 물론 역사, 문화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워커씨는 『한국은 내 인생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며 거의 반세기에 걸친 한국과의 인연을 자랑스러워 한다.
이번에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도 『학자로서의 한 생애를 정리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친구들에게 한국과 한민족의 경이로운 발전과정을 지켜본 소감을 전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고록 관련 문의전화:한국일보 국제부 (02)724―2325
▲E―mail 주소:kjhkilbo@203.240.142.11<이종수 기자>이종수>
□약력
▲1922년 4월12일 펜실베이니아주 벨폰테 출생
▲뉴저지주 드루대학 졸업(역사·정치학 석사·1944)
▲예일대 졸업(국제정치학 박사·1950)
▲예일대 교수(1950∼57)
▲사우스캐롤라이나대 국제문제 연구소(현 리처드워커 연구소) 창립
▲2차대전 기간중 맥아더 사령부의 중국어 통역관으로 근무, 한국전 참전(1950)
▲미 국무부, 공보처 등 근무
▲한국체류(1973)
▲최장수 주한 미 대사(1981.8∼1986.11)
▲16권의 저서출판·한국관계 논문 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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