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산밑에 너비 100여m 물웅덩이/가족 부모님·외할머니 등 모두 7명/남동생은 장딴지에 화상자국캄보디아에 거주하는 군대위안부 출신 「훈할머니」의 혈육찾기에 앞장서온 한국일보는 국내외 취재망을 동원, 그의 친족확인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훈할머니의 귀국초청과 가족확인 작업을 꾸준히 전개함으로써 군대 위안부문제에 대한 당국의 관심과 대책을 촉구할 예정입니다. 본보는 이에따라 8일부터 훈할머니 찾기 핫라인을 가동합니다. 전화번호는 02)724―2325 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편집자>
훈할머니는 지난달 26, 27일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집중적인 증언채록 과정에서 마을 근처에 염전과 나환자촌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기억해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고향의 풍경과 가족관계를 새로운 증언을 통해 정리한다.
▷고향◁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을 가로질러 시내가 흘렀다. 폭은 3∼4m로 그리 넓지 않았지만 꽤 깊고 물이 많았다. 마을은 시내를 중심으로 둘로 나누어져 우리 집이 있는 쪽에 산이 있고, 반대편에 시장 학교 관공서 등이 있었다.
산 밑에는 너비 100m는 됨직한 길쭉한 모양의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는 계절, 밀물 때면 바다와 이어졌고, 건기 땐 물이 마르기도 했다. 집에서 바라볼 때 산의 가장 오른쪽 봉우리에 절이 있었다. 어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가곤 했는데 이 절에는 맛좋은 샘물이 두 개 있어 하나는 스님들만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마을 주민들이 이용했다. 집에서 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가에 빨간 지붕의 제법 큰 규모의 교회가 있었다. 바다 가까이, 그 그늘에 수십명이 앉아 쉴 수 있는 정도의 큰 나무들이 몇그루 있었는데 동네 꼬마들은 그 밑에서 놀다가 바닷물이 빠지면 달려가 조개 따위를 잡곤 했다.
마을은 반나절에 다 둘러보기 어려울 만큼 컸고 무얼 하는 곳인지 잘 몰랐지만 큰 관공서도 세 개나 있었다. 시내 건너편쪽 마을 끝의 부두 앞바다에 섬이 있었고, 그곳에 배를 타고 놀러가기도 했다. 부두 못미처에는 제법 큰 염전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놀러가 소금 만드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가족관계◁
『가족은 부모님과 외할머니 언니 남동생 여동생 등 7명이었다. 두세 살 위의 언니는 열살이 넘은 후론 일본에 사는 큰어머니(고모?)댁에서 살다 내가 고향을 떠나기 몇달전 돌아와 결혼한 뒤 다시 떠났다. 외할머니도 언니 결혼식을 한 달쯤 앞두고 돌아가셔서 내가 고향을 떠날 당시 함께 살던 식구는 5명뿐이었다. 우리 집은 양반은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편에 속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사람들은 「공무이(공문?)」라고 불렀다. 성은 창씨개명때 「가와리」로 바꿨지만 이 이름은 한국이름이었다. 당시로서는 큰 키에 얼굴이 희고 잘 생겨 여자들이 많이 따랐으며 나중엔 둘째부인을 얻어 두 집살림을 했기 때문에 얼굴을 자주 뵐 수 없었다. 프놈펜에 온 지 1년만에 남동생이 보낸 편지에 아버지가 그 여자랑 헤어졌다는 소식이 적혀있었다.
나처럼 키가 작고 피부가 검었던 어머니는 인근 도시에서 옷가지나 비녀 장신구 등을 떼다 집집마다 팔러다니며 생계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 이외에도 집에서는 일꾼 4∼5명을 들여 엿을 고아 팔기도 했다.
형부는 일본서 사업하던 분으로 결혼한 뒤에야 한쪽 눈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향을 떠날 당시 국민학교 2학년(8, 9세 정도)이었던 남동생은 아버지를 닮아 잘 생겼고, 장딴지에 화상을 입은 작은 상처가 있었다. 여동생은 당시 4∼5세 정도여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왜 그리 어리석었는지 학교가 다니기 싫어 빼먹기도 하다가 2∼3년만에 그만 뒀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는데 그래도 친구들이 졸업할 때 친구를 통해 졸업장은 받았다』<이희정 기자>이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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