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에 대한 정의나 개념이 시대를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진나라의 시황제 시대는 물론이고 프랑스의 루이왕조나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시대에는 왕권이 절대적이어서 지도자는 무제한의 강권을 발동하면서라도 백성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갈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왕권은 태양과 맞먹는 것이었고 군주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민주사회는 그렇지 않다. 만인이 평등해야 하는 세상에 지나치게 두드러진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위험천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로마는 카이사르의 통치 아래 공화정치를 포기하고 제정으로 탈바꿈할 수 밖에 없는 위기를 맞이했던 것이고 사실상 그의 조카뻘인가 되는 오거스터스때 공화정치체제를 포기하고 제정으로 전환한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임이상을 용납하지 않던 미국 정치사의 틀을 깨고 4선에 도전하여 성공하였으니 그가 임기를 다 채웠으면 도합 16년동안 백악관의 주인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 미국인들은 불문율만 가지고는 지켜질 수 없게 된 3선 금지조항을 헌법개정안으로 만들어 아예 못을 박아 놓은 셈이다.
민주질서가 독재자나 전제주의자를 용납할 리는 만무하다. 민주사회는 민주적 질서에 걸맞은 민주적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민의 눈에 매우 소박하고 진실하게 보일 뿐 아니라 『나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탈피한 사람이어야 한다. 유아독존식으로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은 일시적으로 유권자를 속여 정상에 올라앉아도 그 속임수가 오래 가지 못한다. 그 오만·자만 때문에 결국은 실정의 늪에 빠지고 만다. 그런 지도자들을 우리도 여럿 지켜보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믿는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기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엄청난 직책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자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간곡한 기도였다. 남북이 갈라서서 전쟁을 하게 됐으니 자기처럼 무능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큰 일을 해낼 수가 있겠느냐는 단순한 논리였다. 그렇게 겸손한 자세로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던 그는 역사에 남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교만한 자세로 청와대의 주인이 된 지도자들은 모두 불행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또한 그럴 것이다.
여당인 신한국당의 15대 대통령 후보가 누가 될지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그가 누구이건 겸손하면 이기고 교만하면 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줄곧 여당후보만이 당선의 영예를 차지하였고 야당후보는 대개 청와대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하였다. 야권은 매번 후보를 단일화하지 못해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여당의 후보를 이기지 못하였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도 그런 현상이 벌어질 것이 뻔한데 왜 일이 그렇게 한심스럽게 끝나야 하는가. 저 잘난 맛에 사는 교만한 지도자들이 야권의 일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권의 단합과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15대에도 대통령은 여당에서 나올 가능성이 100%는 못되더라도 아마 95%는 될 것이다. 아마도 여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자들은 야권의 분열을 전제하고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열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후보공천만 되면 청와대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탄탄대로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일반 대학이나 육군사관학교 같은 특수 대학이나 어쨌건 대학만 마쳤으면 대통령이 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나라의 최근 역사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이 출마한 경우가 있었지만 당선은 되지 못하였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밖에 안되더라도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이 대권을 장악할 후보자로 등장하기를 국민은 학수고대하고 있다. 국민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런 인물은 없는가. 그런 지도자는 없는가. 없으면 이제부터라도 그런 인물, 그런 지도자를 우리 손으로 길러내야 할 것 아닌가.<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