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책 만들자” 금속활자 혁신/태종시대 계미자 개량해 인쇄능률 배로 높인 ‘갑인자’ 완성/‘조지서’ 설치 종이에 큰 관심/노인위한 대형활자 ‘병진자’도 개발/농사직설·효행록·치평요람 등 농학·외국어·군사학까지 온갖 책 출판남달리 영특했던 세종대왕에게 책은 그의 분신과도 같았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못지 않게 세종은 독서를 통해 지혜를 터득했다. 면학과 독서 습관이 몸에 밴 대왕은 어느날 고전을 읽다가 늘 마음에 두고 있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책을 읽을 때 마다 가슴에 묻어둔 「이렇게 좋은 내용을 백성과 함께 나눌 수는 없을까」라는 안타까움은 인쇄술과 출판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에 더나아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를 낳았다.
인쇄술의 발전에 따라 언어학 음악 의례 국문학 외국어 외국문학 농학 사냥 의학 약학 법의학 국사 외국사 철학 유학 불교 교육 법전 군사학 중국법전 천문학 수학 지리학 지도 달력 사전 서예교본에 이르기까지 온갖 책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경험 많은 농부에게 농사짓는 법을 물어 편찬한 「농사직설」처럼 실생활에 긴요한 서적이 많았다. 역대 효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효행록을 비롯, 삼강행실, 향약집성방,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역대병요 등도 세종시대에 나온 불후의 고전이다.
1434(갑인)년 7월2일. 대왕(당시 37세)은 금속활자인 갑인자(갑인자)의 완성을 기뻐하며 지신사(비서실장) 이천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태종께서 주자소(활자를 만들고 책을 인쇄하는 국립출판사)를 처음 설치하고 큰 활자를 만들 때 하나같이 어렵다고들 했다… 내 일찍이 경(이천)을 불러 다시 잘 만들어보라고 했을 때 경도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강행토록 했고 경이 지혜를 짜내 판을 짜고 쇠활자를 부어 인쇄하는 장수가 많아도 글자가 기울지 않으니 기쁘기 그지 없다… 최근 여진족을 치느라 구리와 쇠의 쓰임이 많고 기술자도 일이 많지만 활자 붓는 일도 꼭 해야 하기에 경이 이를 맡아 하기를 명하노라』
세종대의 인쇄술혁신은 부왕인 태종의 생각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태종은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널리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치국과 평천하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라며 『구리로 글자를 만들어 서적을 얻을 때마다 인쇄해 널리 퍼뜨리면 그 이로움이 무궁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활자주조사업을 밀어부쳤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계미자(1403년)요, 금속인쇄술이었다.
갑인자는 바로 이 계미자와 이를 개량한 경자자(1420년)를 더욱 아름다운 글자체로 개량한 활자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밀랍을 쓰지 않고 판에 대나무쪽과 종이를 끼워 활자가 움직이지 않게 판을 짤 수 있게 함으로써 인쇄능률이 전보다 배나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로써 15세기 초반 조선의 인쇄술은 서양은 물론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과학사가인 전상운 전 성신여대총장은 『청동활자 인쇄기술로 조선은 책을 새로 편찬하거나 중국에서 새 책이 나왔을 때 적은 부수라도 이른 시일 안에 찍어낼 수 있게 됐다』며 『이는 새로운 정보매체의 기술혁신』이라고 평가한다.
대왕은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기고 왕의 직속기관으로 바꿔 일의 진행을 일일이 챙겼다. 심지어는 활자를 붓고 판을 짜고 하는 천인출신 장인(기술자)까지도 우대했다.
종이조달을 위해 조지서를 두고 종이 질 개량에도 관심을 쏟았다. 국산 닥나무종이가 너무 두터운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대마도에서 왜닥을 들여와 재배하기도 하고 종이에 삼, 면화, 뽕, 벼, 보리, 대, 율무, 창포, 갈대, 모시 등 여러 섬유를 섞어쓰는 실험도 해보도록 했다.
한번은 한 신하가 중국어 교본인 「노걸대」와 「박통사」를 번역해서 찍게 하고 대왕이 직접 배우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전하, 중국어책을 어째서 보시려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세종은 『명나라 사신을 대할 때 (통역이 있긴 하지만) 그 말을 미리 알면 대답을 빨리 생각하여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그만큼 현실적인 필요를 중시했다.
세종 18년 1436(병진)년 7월에는 병진자가 만들어졌다. 이 활자는 세종의 특명에 따라 눈이 어두운 노인들이 읽기 쉽도록 보통 활자보다 배 가까이 크게 만든 것이다. 글자본은 당대의 명필 진양대군(후일 수양대군·세조)이 썼다.
손보기 단국대 석좌교수는 「세종시대의 인쇄출판」이라는 저서에서 『세종때 찍은 책들을 보면 틀린 자를 고친 것을 찾을 수 없고 먹빛도 고르게 나타난다』며 『얼마나 정성들여 글자를 고르게 심었던가를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이광일 기자>이광일>
◎돋보기/이천/왜구정벌·활자·화포주조 큰몫 ‘갑옷입은 과학자’
세종시대에는 지금처럼 학벌좋고 머리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국민 삶의 질 향상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인물이 많이 활동했다.
이천(1376∼1451년)은 그중에서도 발군의 인물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갑옷 입은 과학자요 엔지니어였다. 1420년 대왕은 그를 공조참판(과학기술처 차관격)으로 발탁, 계미자 개량을 명한다. 임금은 갑인자 주조사업도 그에게 총책임을 맡겼다. 이천은 10여년간 활자개량에 힘쓰면서 각종 천문관측기기와 악기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다.
사실 그는 타고난 장수였다. 태종 때인 1402년 무과에 급제했다. 1419년 충청도 앞바다에 몰려온 왜구를 물리친 뒤 이종무를 따라 대마도 정벌에 참가했다. 이 때 공으로 충청도 병마도절제사에 임명된 뒤에는 군선 만들기에 힘썼다. 세종 19년 1437년 9월에는 평안도도절제사로 압록강 너머 여진족에 대한 2차 정벌(본보 6월2일자 25면 시리즈 4회 참조)을 마치고 개선한다.
이후 군기감 총책임자로 화포주조사업에 여생을 바쳤다. 문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이제 누가 문무의 직책을 겸할 수 있을까』하고 탄식하면서 이틀동안 조회를 폐하고 상사를 보살피게 했다.
◎세종 어록
『법은 만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행하기가 어렵다』(세종실록 90권 22년 8월11일조).
『법을 만드는 것은 시행하기 위함이다. 시행할 수 없는 법을 만들어서는 안된다』(실록 101권 25년 9월2일조. 우리 사회가 「법대로」 안되는 이유중 하나가 법이 있어도 집행하지 않거나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놓고 자의적으로 집행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대왕의 통찰력은 정말 놀랍고 두렵기까지 하다).
『두루뭉실하게 탄핵하고 문제의 인물을 바로 지목하지 않는데, 이는 다 못나고 간사한 사람이 하는 짓이다. 또 잘잘못을 지적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규탄해야 할 것은 죽어도 피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후환을 두려워하겠는가?』(실록 88권 22년 3월5일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