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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운을 남기는 세상의 향기/윤후명 새 소설집 ‘여우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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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운을 남기는 세상의 향기/윤후명 새 소설집 ‘여우사냥’

입력
1997.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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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서 깨달은 존재의 진실 엮어/“엉뚱한 이상향 보다는 바로 이곳이…”「허무주의와 회의주의를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삶을 긍정하는 문학, 폐허 속에 묻혀 갈 우리들의 아름다운 일순」.

작가 윤후명(51)씨는 자신의 문학을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피폐한 듯하기만 한 우리의 삶을 그래도 긍정적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순간들, 그의 새 소설집 「여우사냥」(문학과지성사간)에 실린 중·단편은 그런 순간들의 기록이다. 그 순간들에는 읽는 이에게 긴 여운을 남기는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 작가 자신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세상의 향기」이다.

「여우사냥」에 실린 이야기는 대부분 길 떠나기를 모티프로 한 기행소설이다. 표제작은 러시아 모스크바의 푸슈킨기념미술관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북쪽 호숫가로 떠난 이야기. 「북회귀선을 넘어서」는 대만 여행과 모교에서 25년만에 열린 재상봉 행사를 통해 과거의 사랑을 더듬는 그리움의 여정이다. 「별들의 냄새」는 중앙아시아 회교도묘지, 프라하 유대인묘지, 프랑스 오베르쉬르와즈에 있는 고호의 묘지로 떠난 순례여행기이다. 작가는 또 「아으 다롱디리1」에서는 백제시대 향로 출토지를 찾는 부여행에 이어 독도로의 여정을 택한다.

왜 떠나는 것인가. 「그러자 독도가 아스라이 멀리 있다는 느낌뿐의 섬임이 비로소 실감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돌연, 내가 이날까지 살아오는 동안 얼마만큼의 진실을 저리 아스라이 간직해온 것일까 하는, 무슨, 청맹과니의 빛 보기 같은 느낌이 가슴 언저리로 잦아드는 것이었다. 별스런 노릇이었다」(「아으 다롱디리1」). 「어쨌든 나이 사십을 훨씬 넘어서도 그가 새로운 세계를 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존경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상주의자가 틀림 없었다」(「여우사냥」). 청맹과니의 빛찾기,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이상주의자의 여정이다. 그것은 곧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윤씨의 이 여행길마다에는 향기가 배어난다. 「북회귀선을 넘어서」에서 그는 갖가지 이름 몰랐던 과일을 만난다. 『우리는 달콤하고 향긋한 향내를 음미하며 그 과육을 맛보았다… 인생이란 자기가 만난 것에 대한 의미 부여로서만이 성립될 수 있음을 나는 안다』 그리고 종내 그는 모교 재상봉 행사에서 만나기를 알게 모르게 꿈꿔 왔던 25년 전의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때 세상 가득히 번지는 향기는 다름 아닌 「그리움」이다. 「비 오는 서울거리를 통해 내게 한결 간절하게 와 닿는 그 향기의 새로운 이름, 그것이야말로 그리움」인 것이다. 「아으 다롱디리1」에서 그는 독도로 향하는 배의 선실에서,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가던 피난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향내를 맡는다. 「저 캄캄한 현창을 붉게붉게 물들인 모든 존재의 향내. 아무도 모를 곳에서 삶과 죽음의 오의로 가슴 아프게 피어 외치는 뜻의 향내. 모든 바다꽃·땅꽃·하늘꽃에 짙은 목숨의 향내. 절규하는 존재의 불가사의한 향내」.

윤씨는 『그 향기는 보다 참되게 무르익은 세계가 분명 있어서 거기서 우러나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은유이지만, 그 세계는 다른 엉뚱한 이상향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는 세계』라고 말했다. 현실적 이상주의자를 자처하는 그에게는 우리가 있는 이 방이, 이 세상이 곧 향로이다.<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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