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독일통일 이래 근 7년 만에, 바로 옆에서 흩어진 국민과 옛 영토를 복원해가는 중국을 본다. 이웃집 잔치이니 기꺼이 축하하면서도, 지구촌 최후의 분단국 시민으로서 아랫배가 살살 아려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사돈이 땅을 사니 배가 아프네」식의 심술이 아니다. 왜곡된 과거사를 다잡아 21세기의 새벽길에 나선 두 나라 국민이 부럽고, 이들에 비해 아득하기만한 우리의 통일여건이 새삼 되짚어지기 때문이다.
관훈클럽 후원 「통일현장 취재단」의 일원으로 최근 독일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정론 디 자이퉁지의 테오 좀머 편집인에게 『북한식량지원에 대해 한국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60년대말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의 「동방정책」을 지지하며 동독지원 및 교류를 주장, 독일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그의 탁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명쾌했다. 그는 『60년대 독일에도 같은 논의가 있었다. 당장 이적이 되더라도 도와야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고 말했다. 신뢰를 통한 교류확대를 주장한 논객의 당연한 답변이었다. 그런데,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막상 기대했던 대답을 듣자 생각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독일이 6·25를 겪었다면, 그래서 이념의 골이 어처구니없이 깊어져 기민당 같은 정상적 사회 정당조차도 착근하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렇게 명쾌하게 주장할 수 있었을까? 또 저쪽으로부터 게릴라를 실은 AN-2기가 방공망을 뚫고 언제라도 침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게다가 독일은 이미 51년 교역협정, 63년 베를린 통과 사증협정 등 교류의 물꼬가 트인 상태였지 않은가. 모든 것이 너무나 달랐다.
중국도 사실 까마득히 앞서있다. 홍콩주권에 관한한 어떠한 외세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 강국인데다, 80년대부터 홍콩과 본토간 실질교류를 축적, 통합의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온 것이다. 뉴욕에서는 3자 차관보급협의가 천신만고 끝에 오늘 재개됐지만, 협상 이정표보다 여건과 역량의 배양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