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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과 의료의 한국화(다큐멘터리 세종대왕: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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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과 의료의 한국화(다큐멘터리 세종대왕: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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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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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방유취’ 365권 완성 중·일 의학 압도/재위시절 잦은 병치레 영향/전염병 예방 등 백성건강 큰 관심/우리체질·풍토에 적합한 ‘신토불이’ 의학 집대성시켜/‘향약채취월령’‘향약집성방’선 국산약재의 우수성 보여줘세종시대는 의약과 의료에 있어서도 한국화가 이뤄진 시기였다. 당시 의약체계와 치료법은 대부분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었다. 세종은 이를 우리 체질과 풍토에 맞게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세종은 사실 재위기간중에 안질을 비롯한 숱한 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잦은 병치레는 자연히 의약과 진료에 관심을 갖게 했다. 하지만 세종은 자기 한 몸을 위해 의약의 발전을 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보다는 백성을 향한 마음이 절대적이었다.

세종시대 의약발전의 중추는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같은 국립의료기관이었다.

세종 19년 1437년 3월. 전해부터 흉년이 심하고 전염병이 돌아 유민이 많았다.

대왕은 경기·충청·전라·경상도 감사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도내에 임시구제소를 설치한 때부터 와서 먹은 기민과 죽은 사람의 수를 자세히 아뢰고, 구제소까지 오지 못해 중간에서 죽은 사람, 도착하여 죽은 자는 몇명이며, 병들어 죽은 자는 무슨 증세로 죽었는지, 병에 걸린 자, 고향으로 돌아간 자, 지금 있는 자, 길에서 떠돌다 죽은 자의 수와 전염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두 빨리 아뢰라. 서울 임시구제소에서 백성이 죽은 것을, 처음에는 주리고 지친 사람이 갑자기 너무 배불리 먹어 상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성부(서울시청)에서 「이처럼 따뜻한 때에 한 곳에 모여 있기 때문에 역기가 서로 전염되어 많이 죽는 것」이라고 하여 병자를 활인원에 옮기도록 했다. 전염병이 있는 자가 있으면 가급적 여러 곳에 나눠 수용하고, 도내에 역기가 있으면 이 예에 따라 조치하라』

그러나 최대의 업적은 각종 의학서적의 편찬이었다. 의학도 이론적 기초를 다지고 이를 책으로 집대성해 교육과 활용에 편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방유취」. 세종(당시 48세)은 1445년 10월 집현전 학자들에게 편찬을 명한다. 3년여에 걸쳐 안평대군과 의원 노중례의 감수를 거쳐 전 365권으로 완성된다. 이 책은 각 질병을 문으로 나눠 원인 증상 처방을 제시했다. 이에 더해 인용서는 연대순으로 나열, 여러 학설을 비교·검토할 수 있게 했다. 인용된 중국 문헌만도 당·송·원·명나라 초기까지의 152종이나 된다. 의방유취는 중국이나 일본을 통틀어봐도 규모나 내용 면에서 견줄 만한 것이 없는 동양 최초 최대의 종합의학전서다.

허정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지난달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탄신 600돌 기념 21세기 문화·과학을 위한 세종대왕 재조명」 세미나에서 『의방유취에는 오늘날 없어져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중국 의서 40여종이 들어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의방유취는 중국 고전의서들을 고증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은 이후에 나온 동의보감같은 각종 의학서에 널리 인용됐다.

이에 앞서 편찬된 「향약채취월령」과 「향약집성방」은 의학의 「신토불이」를 강조하고 있다. 세종은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중국산 약재(당약) 대신 구하기 쉽고 우리 체질에 맞는 국산약재(향약)를 중시했다.

또 사람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약초를 채취하기 때문에 약효가 떨어지는 폐단을 막기 위해 향약채취월령을 편찬토록 했다. 이 책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월별로 채취하는 방법과 건조·보관법을 적은 것이다. 특히 한글반포 전이어서 약재 이름을 모두 이두로 병기해 일반인도 알기 쉽게 했다. 예컨대 사삼은 「가덕」이라 했는데 「더덕」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황금은 「이부근초」로 「속썩은풀」이다.

향약집성방은 조선초에 나온 「향약제생집성방」을 중심으로 여러 처방서를 모아 분류하고 첨가한 것. 세종 15년 1433년 6월에 완성됐다. 모두 959가지 증상에 대해 1만706가지 처방을 담고 있다. 침과 뜸에 관한 법도 1,476가지를 실었다.

『백리천리에 떨어져 살면 서로 풍습이 다르듯이 초목도 각기 적당한 곳이 있고, 사람도 좋아하는 음식과 습성이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과 바다에 무진장한 보화가 있고 풀과 나무는 약재를 생산하여 병을 치료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 없다. 다만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 시기에 맞춰 채취하지 못하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고, 먼 것을 구했으며, 병들면 굳이 중국의 어려운 약을 구하니, 이미 치료할 시기를 잃곤 한다』고 한 서문은 이 책의 편찬동기를 잘 말해준다.

세종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15세기 조선은 「병든 자는 치료받는」 당당한 문명국이 됐다.

◎돋보기/명의 노중례/자타공인 최고 ‘의원’/양녕대군 등 왕실치료 전문/세자 오진으로 대기발령도

의원 노중례(?∼1452년)가 죽었을 때 문종은 『의업으로는 근세에 비할 자가 없다』고 극찬하며 애석해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종시대 최고의 명의였다. 일찍이 세종의 명으로 양녕대군을 치료했고 명나라에 가서 일급 의사들과 중국산 약재와 우리나라 약재(향약)의 같은 점과 다른 점, 효과에 대해 토론, 향약정리에 크게 기여했다. 세종 13년 1431년 12월 전의감 정(정3품으로 국립의료원장격)으로 있을 때 박윤덕과 함께 「향약채취월령」을 저술했으며 「향약집성방」을 편찬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특히 출산과 유아 양육법을 다룬 「태산요록」을 손수 지었고 의학백과사전인 「의방유취」를 감수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왕비와 대군들의 병을 치료한 공으로 여러 차례 옷과 말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 때는 세자를 잘못 치료했다 하여 간신히 파직을 면하고 대기발령을 받기도 했다.

◎세종어록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세종실록 32권 8년 5월11일조. 흉년이 들자 곡식을 축낼 것을 우려해 금주령을 내린 상황에서 비서관들이 건강을 위해 술을 좀 드시라고 간청하자 이에 답한 말. 세종은 이처럼 매사 솔선수범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었다).

『대신을 임명하고 면직시키는 일은 경솔하게 할 수 없다』(실록 37권 9년 7월14일조. 대사헌이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의 잘못을 들어 탄핵하자 답하면서 한 말. 앉힐 만한 사람을 앉히되 앉혔으면 사소한 허물로 내치는 게 아니라는 인사철학이다. 총리까지 몇 달만에 갈아치우곤 하는 요즘 세태와 달랐다).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은 본성에 달린 것이지, 나이가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실록 51권 13년 2월5일조).<이광일 기자·제자:안상수 교수(홍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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